고대 사회에서 이자는 '고리대금'
바빌로니아, 곡물의 연평균 이자율 33.3%
페르시아는 원금 절반 가까이 이자로 매겨
백제 연 50%, 고려 33%, 조선시대는 10%

중세 유럽선 '이자 금지'
교황청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자본 이상 요구하는 건 탐욕, 정의에 반해
11세기까지 고리대금업은 도둑질 취급받아

경제활동이 이자 인식 바꿔
"채권자가 못 받은 돈에 위약금 부과는 당연"
교회법 학자들, 로마법의 판례 뒤집기 시작
신용 시스템 발달로 대부 위험 낮아져
백제시대 이자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충남 부여 쌍북리 저습지에서 출토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목간.  한경DB
백제시대 이자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충남 부여 쌍북리 저습지에서 출토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목간. 한경DB
“소마(素麻)는 1석 5두(一石五斗)를 빌려 1석 5두를 상환했으며 아직 7두 반(七斗半)이 남아 있다.”

2008년 충남 부여 쌍북리 저습지에서 출토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목간에는 백제의 이자 관련 기록들이 담겨 있다. 특히 관(官)이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회수하는 과정에서 연 50%에 달하는 높은 이자율을 적용한 사례가 다수 눈에 띈다. 고려시대에 ‘쌀 15두(斗)에 5두’ 하는 식으로 연 33% 정도의 이자율을 적용했고, 조선시대 환곡(還穀)이 감가상각비 조로 모곡(耗穀) 10%를 더 받은 것에 비하면 상당한 고리(高利)가 아닐 수 없다.

외국에서도 고대사회에선 ‘이자’가 ‘고리대금’ 수준이었던 게 흔한 일이었다. 원금을 떼일 위험이 크고, 농업의 한계생산성이 증대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에선 곡물의 연평균 이자율이 33.3%에 달했고, 아시리아(30~50%)와 페르시아(40%)에선 원금의 절반 가까이 이자로 냈다. 다만 실제 이자를 취하는 데는 유연한 면이 있었다. 함무라비법전은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는 1년간 곡물 이자의 수취를 유예할 것을 명시했다.

고대 그리스에선 ‘선박 저당 대부(bottomry loans)’가 자주 접할 수 있는 이자의 형태였다. 미리 돈을 빌려줘 배를 빌리거나 화물을 확보하도록 한 뒤, 해상 교역을 마치면 큰 폭의 이윤을 챙기는 행위였다. 배가 침몰하면 한 푼도 챙길 수 없지만, 해상 교역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아테네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의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왕복할 경우 전시에는 이윤이 투자금의 30%, 평시에는 투자금의 22.5%를 ‘이자’로 챙겼다. 위험한 항해의 경우에는 ‘이자율’이 100%까지 치솟았다.

고대 로마에선 12표법 등에서 법정 최고 이자율을 연 8.3%로 정했지만, 실제 일상 거래에선 더 높은 이자율을 시행했을 것으로 본다. 이후 로마의 최고 이자율 혹은 일반 이자율은 시대에 따라 연 8.3~연 12.5% 수준을 오갔다.

중세 유럽에선 원칙적으로는 이자를 걷는 것이 금지됐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출애굽기’ 22장 25절)라는 <성서>의 한 구절처럼 이자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이런 시각의 배경에는 신의 영역인 ‘시간’을 침범한 것이란 인식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리대금업자들은 터부시됐다. 850년 파비아 교구에 의해 고리대금업자들이 파문됐다. 11세기까지 고리대금업은 ‘도둑질’의 한 형태로 취급받았다. 간음이나 난봉, 살인, 거짓 증언, 불경 등의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자신의 죄가 신물이 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지만, 고리대금업자의 이익은 고리대 사업자가 자거나 깨어 있거나 상관없이 쉼 없이 축적된다는 입장이었다. 고리대금업은 자선의 부재이자 탐욕의 증거였으며 정의에 반하는 죄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대부를 비판적으로 봤다. 교환은 자연스러운 행위이고 생산적일 수 있지만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태생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돈은 불임의 척박한 존재로 봤으며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돈이 돈을 낳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반복됐다.

교황청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Mutuum date, nihil inde sperantes)”라는 누가복음 구절이나 “자본 이상으로 요구되는 것은 다 고리대금(Quicquid ultra sortem exigitur usura est)” 등의 문구를 앞세워 이자에 대한 이념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돈은 새끼를 만들지 않는다(nummus non parit nummos)”라고 직설적으로 일갈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대부업자 샤일록의 악랄한 이미지는 이런 선전 작업이 누적된 결과였다.

하지만 이자 수취의 ‘관행’을 근절할 수는 없었다. 현실에서 각종 대부 활동은 불가피했다. 이자를 정당화하는 움직임도 늘어났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도는 “모든 대부업은 이윤이지만, 모든 이윤이 대부업은 아니다”라며 탈출구의 물꼬를 텄다. 곧이어 교회법 학자들은 로마법의 판례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달력을 의미하는 ‘캘린더(calendar)’라는 단어가 로마시대에 원금을 다 갚고 이자 지급이 만기가 되는 달의 첫날을 의미하는 ‘칼렌다이(kalendae)’에서 나왔고, 라틴어 ‘칼렌다리움(calendarium)’이 ‘달력’이라는 뜻보다는 ‘회계장부’를 의미했을 정도로 로마시대에는 이자를 다룬 선례가 풍부했다.

그 결과, “채권자가 돌려받지 못한 돈에 대해 위약금을 부과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로마법 판례를 원용해 이자를 위약금으로 치환하며 정당화할 수 있었다. 원금과 위약금을 포함한 총금액 간 차액은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뜻의 ‘쿠오드 인테르 에스트(quod inter est)’라고 불렸고 교회법 학자인 볼로냐의 아초(ca.1150∼1230)가 제일 먼저 이 말을 줄여서 ‘interest’라고 칭했다. 이는 오늘날 ‘이자(interest)’의 어원이 됐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이자의 탄생, 시작부터 따라다닌 惡의 이미지
경제사가 빌헬름 로셔가 “문명화의 진전에 따라 이자율은 낮아진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이자율은 시대가 지날수록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사회 안정과 시장 효용의 증대, 신용의 발달에 따라 대부의 위험도가 줄어든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오랫동안 ‘높은 금리=악(惡)’으로 여겨졌고, 이런 인식이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바꾼 것은 도덕이나 윤리, 철학이 아닌 실제 경제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