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리품 차지하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 페르시아와 전쟁서 승리
황금잔 2000kg 등 사치품 챙기고 나눠
일반 병사도 노예·짐승까지 막대한 이득 챙겨
중세 이후 '약탈 경제' 수익성 악화
전쟁 수익성 일정치 않고 분배도 고르지 않아
왕의 몫 줄어들고 귀족들도 극소수만 '재미'
포로 몸값도 수수료·이자 떼면 남는 것 없어
알렉산드로스 대왕, 페르시아와 전쟁서 승리
황금잔 2000kg 등 사치품 챙기고 나눠
일반 병사도 노예·짐승까지 막대한 이득 챙겨
중세 이후 '약탈 경제' 수익성 악화
전쟁 수익성 일정치 않고 분배도 고르지 않아
왕의 몫 줄어들고 귀족들도 극소수만 '재미'
포로 몸값도 수수료·이자 떼면 남는 것 없어

이 점토판에는 매일의 날씨와 천문 현상이 촘촘하게 기록돼 있다. 화성이나 금성 같은 행성과 별들의 움직임은 물론 비, 우박, 돌풍 등의 기상현상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자연현상뿐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점토판 322)과 같은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기록도 체계적으로 남아 있다. 특정 날짜의 상품 가격 등도 담겨 있어 역사 정보로서 가치가 작지 않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점토판 320’이다. 이 점토판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간 운명이 결정된 가우가멜라 전투를 전후한 시기의 정보가 기록됐다.
왕의 호칭 변화도 눈에 띈다. 가우가멜라 전투가 있던 날(24번째 날) 아침에 점토판은 다리우스를 가리켜 ‘세계의 왕’이라고 부른다. 곧이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 대패한 내용을 언급하고선 “왕의 부대가 그(다리우스)를 버리고 떠났다”고 묘사한다. 조금 더 뒤에는 “세계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 들어왔다”라고 담담하게 기록한다. 저명한 고대사학자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이를 두고 “누가 왕이 되었든, 신전의 기록은 그저 계속 이어질 뿐”이라고 평했지만,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정보 속에서 당대인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사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두 대왕의 대결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닌 세계사의 흐름을 영원히 뒤바꾼 큰 사건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정면충돌한 것은 기원전 333년 소아시아 이수스에서다. 그리고 전투의 뒤처리 과정은 고대 이후 만연한 ‘약탈 경제’의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전의 그 어떤 마케도니아·그리스 군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아리아노스는 마케도니아군이 전투 직후 3000탈란톤의 금과 은을 페르시아 진영에서 찾아냈으며, 주요 화물이 맡겨져 있던 다마스쿠스에서는 더 많은 것을 찾아냈다고 전한다. 쿠르티우스는 2600탈란톤의 동전과 230kg의 은세공품, 2000kg이 넘는 황금잔, 그리고 1500kg이 넘는 기타 세공품과 장신구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획득한 전리품의 공식 수치로, 병사들이 챙긴 것과 분배를 위해 수거되지 않은 것도 많았다.
알렉산드로스군에 합류한 테살리아인들은 특히 다마스쿠스에서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하며, 그들의 용기에 대한 보상으로 전리품 챙기는 임무가 맡겨졌다. 금과 은 외에도 향, 비단, 예복 등 온갖 종류의 사치품이 다마스쿠스에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심복 파르메니온이 도착하기 전에 화물을 빼내 옮기려던 시도가 좌절되자 운반자들은 겨울의 추위를 피하고자 최고위층 귀족만 입는 자색 예복을 몸에 둘렀다고 전해진다.
이수스 전장에서 생포된 다리우스의 심부름꾼과 하인만 3만 명이었고, 짐을 나르는 짐승도 7000마리나 됐다. 모두 마케도니아의 보급품 수송대에 추가되었다. 음식과 음료 준비에 전문화된 하인도 300명 가까이 됐다. 이전에 다리우스 소유이던 매우 아름다운 장식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전달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마련해준 <일리아스> 필사본을 보관하는 데 사용됐다.
알렉산드로스는 너그럽게 전리품을 나눴고, 많은 사치품이 본국으로, 특히 그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돌아갔다. 그의 장교들은 많은 전리품을 누렸고, 병사들 또한 그러했다. 다들 많은 수의 노예를 얻었다.
전쟁이 ‘약탈 경제’의 수단 역할을 톡톡히 하던 시대의 모습이다. 전쟁의 목적 중에 전리품 획득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모습은 이후 꽤 오랫동안 유지됐다. 중세 시대에도 약탈은 수지맞는 장사였다.
하지만 수익성은 일정하지 않았다. 날마다 전리품을 챙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리품을 얻는 것은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약탈은 사회 상층보다 하층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알렉산드로스가 좋은 몫을 독차지하던 시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전리품을 챙기는 과정에서 왕이 꼭 ‘사자의 몫(가장 큰 몫)’을 챙기는 것은 아니었다. 백년전쟁 시기에 벌어진 약탈 과정에서 영국군의 최고 군사 지도자였던 흑태자(Black Prince)는 존 호크우드와 토머스 대그워스 같은 실무자급 지휘관보다 훨씬 적은 이익만 거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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