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언어는 권력의 언어
아우구스투스 문학, 라틴어 문학 황금기 평가
유명 시인들, 황제 취향 맞춰 로마 역사 읊어
아우구스투스 신격화…제 2 건국자로 만들어
프로파간다에 능했던 황제
위기 때마다 적극적으로 대중 선전·선동
자연재해를 원로원 때문이라며 정적 숙청
빵·서커스로 로마시민 길들이며 신성한 존재로
아우구스투스 문학, 라틴어 문학 황금기 평가
유명 시인들, 황제 취향 맞춰 로마 역사 읊어
아우구스투스 신격화…제 2 건국자로 만들어
프로파간다에 능했던 황제
위기 때마다 적극적으로 대중 선전·선동
자연재해를 원로원 때문이라며 정적 숙청
빵·서커스로 로마시민 길들이며 신성한 존재로

서구 문학사에서 ‘아우구스투스 문학(Augustan literature)’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라틴어 문학의 황금기로 평가된다. 당대의 유명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엘레지(悲歌) 작가 티불루스, 프로페르티우스와 오비디우스는 모두 아우구스투스 혹은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이미지를 조성하는데 동원됐다.
이들 문인은 ‘존엄한 자’라는 뜻을 지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처럼 절대 권력자의 업적과 덕성이 문학 작품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들은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상(像)을 만들어 나갔다. 시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듣기를 원하는 데로 로마의 역사를 읊었다. 시인의 언어는 곧바로 권력자의 언어였다.
기원전 19년경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베르길리우스는 대표작 ‘아이네이스’에서 건국의 영웅 아이네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상적인 지도자(프린켑스)의 이미지를 도출했다. 신화 속 인물이었던 아이네이아스와 카이사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사이의 연관성은 지속해서 암시됐다. 베르길리우스는 독자들에게 그의 황제이자 후원자가 신들의 후손이며 영웅적인 인물의 후예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특히 이상적인 리더에게 뒤따르는 책임을 다룬 긍정적 이미지들이 이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구현됐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속에서 ‘신(카이사르)의 아들(옥타비아누스)’은 “라티움의 평원에 황금의 시대를 되돌릴 것”으로 묘사됐다.
대중을 오도하고, 대중의 의견을 조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파간다의 개념은 고대 세계에서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원수정 시대 아우구스투스 시대엔 선전 ·선동이 더욱 직접적인 형태로, 훨씬 다방면으로 진행돼 말 그대로 현실 속 일부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대중의 호의를 얻는 데 있어 선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안토니우스와 대립해 싸울 때부터 오직 아우구스투스만이 로마 제국을 클레오파트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선전전을 편 경력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하고 로마로 돌아온 후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행위인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도록 하는 칙령도 반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후일 “내가 태어나기 전에 로마 건국 이후 두 번밖에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지도하에 원로원은 세 번이나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도록 조치했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오늘날 TV와 영화처럼 문학이 선전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시인들은 자신을 후원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대변자가 됐고 로마의 황제가 위대함과 관대함, 엄정함 같은 명확한 덕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해나갔다.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은 신격화됐으며 그는 군사적 지도자이자 정치가, 그리고 평화를 가져온 이로 그려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설적인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에 이어 제2의 건국자로 자리매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20대를 넘어 늙어가는 자기 모습을 조각이나 동상, 그림, 동전을 통해 드러내지 못하게 했다. 70대까지 살았고, 치아 상태도 좋지 못했던 실상과는 동떨어진 조치였다.
종교의 영향이 크던 시절, ‘신격화’는 로마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아우구스투스가 신성한 존재라는 인식은 당대의 로마인에게 빠르게 스며들었다. 자연재해가 아우구스투스 신격화의 속도를 높였다. 기원전 23~22년 전염병과 홍수, 기근이 이어진 것은 아우구스투스 신격화의 계기가 됐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천둥을 동반한 일련의 폭풍이었다. 한번은 아그리파가 세웠던 판테온 신전에 벼락이 쳐서 다른 신들의 동상과 함께 있던 아우구스투스 동상이 손에 쥐고 있던 창이 땅에 떨어졌다. 이는 당시 로마 상황에 대해 신들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징조로 여겨졌다.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인들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우구스투스를 집정관으로 삼지 않았던 탓으로 여겼다”고 묘사했다. 폭동을 벌인 군중들은 원로원 의원들을 가둔 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이 되지 않는다면 원로원 의원들을 산 채로 불태우겠다”고 압박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신격화에 활용했던 마르스신과 베누스 여신은 ‘평화’와 ‘안정’의 상징으로 활용됐다. 1863년 발견된 유명한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은 이런 신격화 작업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이 동상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맨발을 한 채 갑옷을 입고 있다.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은 신(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신격화된 동시에 평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고대부터 권력 뒷받침한 기둥 '국정홍보'](https://img.hankyung.com/photo/202504/01.40051726.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