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통제하려는 국가
한 무제, 상인 출신 상홍양에 국가 재정 맡겨
소금·철 국가 독점으로 국고 대폭 늘렸지만
씀씀이 커지고 물난리로 재정 순식간에 소진

부자세가 실패한 이유
자산가 겨냥 재산세 도입하자 부자들 재산 은닉
부를 쌓기보단 버는 대로 바로바로 소비

과도한 세원 확대가 부른 저항
술 생산부터 유통까지 국가 관리 추진
유학자들 "백성과 이익 다투는 일 안돼" 비판
소금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조세 수입원이었다. 사진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의 한 염전. /한경DB
소금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조세 수입원이었다. 사진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의 한 염전. /한경DB
전통 시대 중국에선 상업 활동과 상인, 그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한 조세 수입과 관련해 국가가 상업 발전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과 이에 저항하는 민간의 움직임이 오랫동안 대립했다.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민간 격언의 뿌리는 깊었다. 일찍부터 발달한 상업·시장경제와 이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국가 간에는 긴장 관계가 꾸준히 이어졌다.

자본 활동과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중국사 초기 단계부터 등장했지만, 이는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 구조를 유지하고, 농업 중심적 경제를 관철해야 한다는 시각이 중국사의 전 시대를 관통한 주류 사상이기도 했다.

한나라 때 상홍양(桑弘羊)이란 인물과 얽힌 이야기는 이러한 국가권력과 민간 상업 간 긴장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다. 기원전 110년 한나라 무제는 낙양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을 발탁해 국가 재정을 맡겼다. 상인 출신답게 상홍양은 상공업과 무역을 중시한 현실적 인물이었다.

상홍양의 정책 구상은 그의 저서 <염철론(鹽鐵論)>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재정과 외교, 도덕, 철학 등 다방면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경제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특히 책의 정책 초점은 국가 재정에 맞춰져 있었다.

때마침 국가의 자금 수요가 폭증했다. 앞서 기원전 140년 한 무제 즉위 이후 한나라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이민족과 군사적 대립이 늘면서 국가 재정 수요가 급증했다.

국가 재정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에게서 거둘 수 있는 세금에는 이미 한계가 있었다.

상홍양은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염철전매(鹽鐵專賣)’ 제도를 도입했다. 유통구조를 개선함으로써 국고를 늘리는 정책도 시행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당장 염철전매로 수입이 늘자 곧바로 씀씀이부터 커졌다. 남월(南越) 출병, 서요(西遼) 토벌, 서북 변경 개발 등으로 애써 확충한 재정이 순식간에 소진됐다.

대규모 천재지변이 발생하면서 모든 계획이 초반부터 틀어졌다. 태행산 동부 지역에서 대형 물난리가 나면서 농민 70여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큰 난리가 났다. 상홍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금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자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일종의 재산세인 ‘산민전(算緡錢)’을 거둔 것이다.

산민전은 돈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자산을 자발적으로 신고하도록 유도해 2민(緡, 1민은 1000전(錢))당 10%, 소규모 상인에겐 5%의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로 보면 일종의 ‘부자세’를 걷어 위기에 처한 농민을 구하려 한 제도였다.

자산가들을 겨냥한 정책을 시행하자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온 상인들은 재산을 은닉하고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은 자산을 은닉한 사람을 1년 동안 변방으로 유배하고, 신고에서 누락된 민전은 전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또한 숨겨놓은 자산을 신고한 ‘세파라치’에게는 몰수 재산의 절반을 줄 것이라며 상인들을 압박했다.

이 같은 정책으로 일부 세수가 느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자산가들의 부담이 늘면서 어렵게 부를 쌓기보다 돈을 버는 즉시 바로바로 써버리는 소비 행태가 나타났다.

이에 대해 당대 관료들은 “황제가 고기 음식을 줄이고 여러 비용을 절약하여 내정(內廷)에 비축한 자금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세도 관대히 완화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농사에 힘쓰려 하지 않는다”며 “상업에 종사하는 자만 더욱 늘고, 가난한 사람은 저축한 것이 없어 오직 조정에만 의지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백성들은 소비에 치중해 저축하거나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기>의 사평은 후대에 두고두고 상홍양의 정책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사마천은 한 무제 시대 상인 출신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도 못마땅해했다. 양을 1000여 마리나 길렀다는 복식(卜式) 등이 장사로 조성한 막대한 재산으로 관직을 매수했다며 직설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공근(孔僅)과 동곽함양(東郭咸陽)에 대해선 “염철전매로 부자가 된 사람만 관직에 등용되고 있다”며 “상인만 관료로 들어올 뿐 올바른 인재는 선택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나마 ‘부자세’ 도입으로도 국가의 재정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기원전 99년 한나라 장군 이릉이 흉노족에게 사로잡히자, 한 무제는 다시 20여만 명의 군사를 투입했다. 상홍양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원을 발굴해야 했다.

상홍양은 소금과 철에 이어 술을 국가에서 독점하기로 했다. 술의 원료를 포함해 생산부터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국가가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과도한 세원 확대 정책은 “국가가 생활필수품을 매개로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동중서(董仲舒)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조세저항이 '시장'과 '국가' 긴장관계 만들었다
애초 새로운 조세제도를 도입할 때 고려했던 효과와 달리, 실물경제의 왜곡과 비효율도 계속되면서 상홍양의 처지도 어려워졌다. 이후 한 무제마저 사망하자 상홍양을 지켜줄 바람막이도 사라졌다. 결국 상홍양은 기원전 80년 75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몰려 멸족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계획에 따른 방책이라도 모든 증세는 강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국사의 초기 단계부터 명확하게 확인된다. 세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위정자에게는 손쉬운 선택일 수 있지만,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엔 가장 어려운 정책인 것이다. 징세의 어려움, 조세정책의 지난함은 역사의 첫 장부터 뚜렷하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