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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우호적이던 미국과 중국, 사이 틀어진 건 조선 탓?
원래 고생하는 사람 따로 있고, 돈 챙기는 사람 따로 있는 법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편전쟁에 매달리는 동안 미국은 둘의 뒤를 따라다니며 짭짤하게 이익을 챙긴다. 청나라에 아편을 팔아먹은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외조부가 중국에서 사업을 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사업이란 게 아편이었다. 인구 대국답게 청나라의 아편 소비량은 상상 초월이었다. 1869년 청나라의 아편 수입 총액이 6195만 냥이었다. 많다는 건 느낌상으로도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일까. 1884년 청나라는 독일에 철갑함선 두 척을 주문한다. 운송비를 포함해 339만 냥이었으니 계산해보면, 1869년 중국인들은 철갑함선 18척을 아편으로 피워 날린 셈이다. 청일전쟁이 벌어진 1894년까지 25년 치를 모두 더하면 450척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하나 마나 한 가정이지만, 이 함선이 모두 실현됐다면 중국은 청일전쟁의 승리는 물론이고 역진해서 유럽도 정복했을 것이다.중국인들의 담배 애호는 유난하다(현재의 전자담배를 발명한 것도 중국).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중국인들은 연기 뿜는 맛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편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미국은 자동 담배 생산 기계를 발명해 이번에는 중국에 담배를 팔아먹는다. 엄청난 광고 공세로 1902년 12억5000만 개비이던 판매량은 10년 후 120억 개비로 증가한다. 거의 한 세기 가까이 미국은 ‘연기 산업’으로 중국을 정말 알뜰하게 빨아먹었다. 그럼에도 청나라 말기 중국인은 미국인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일단 영국과 프랑스처럼 살기등등하지 않았고(2차 아편전쟁 당시 파머스턴 영국 총리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제를 몰아내겠다고 공언했다), 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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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미국,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 헐값에 사들여
조선은 나폴레옹을 몰랐지만 나폴레옹은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816년 조선을 방문한 배질 홀이라는 영국인이 있다. 그는 귀국길에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을 찾아간다. 홀은 자신의 경유지이던 조선과 류큐 왕국, 필리핀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고, 나폴레옹은 그 나라들에 눈까지 반짝이며 흥미를 보인다. 나중에 거기까지 정복하려고? 아니다. 나폴레옹의 정복 유전자가 남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망상 환자는 아니었다.나폴레옹은 유럽 밖에서도 제국을 만들고 싶었다. 그가 배질 홀의 여행기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동양에서 적당한 후보지를 물색 중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몸은 절해고도에 고립돼 있지만 그의 마음만은 여전히 유럽의 제왕이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그리고 그가 전진기지로 선택한 곳이 조선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일단 우리를 한번 신나게 밟아준 뒤 차근차근 동양의 유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와 일본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양에서는 그 후보가 미정이었지만 북미 대륙에서는 그곳이 루이지애나였다(지명은 루이 14세에게 헌정한 땅이라는 의미).프렌치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려던 나폴레옹의 의욕을 꺾은 것은 돈이었다. 영국과의 대결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전쟁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나폴레옹을 찾아온 게 제임스 먼로가 대표로 이끈 미국 사절단이다. 중남부 해안가의 뉴올리언스를 매입하고 싶다는 사절단의 말에 나폴레옹은 한술 더 떠 아예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라고 제안한다. 영국은 뉴올리언스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고, 프랑스가 막강한 영국 해군으로부터 항구도시 뉴올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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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굶주림이 불러온 혁명…역사가들이 멋지게 포장
성실한 작가와 충실한 편집자가 만든 책을 만나면 고맙다. 그들은 독자가 책을 읽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사방에 친절한 안내문을 붙여둔다. 불성실한 작가와 월급이 목적인 편집자가 만든 책을 만나면 짜증난다. 그들은 제 자랑과 오탈자를 잡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독자의 궁금증은 알 바 아니다. 고대 로마의 공중목욕탕에 관한 책을 읽었다. 한참 내부 시설을 소개하더니 입장료는 1‘콰드란스’란다. 그리고 끝이다. 어쩌라고. 그래서 궁금하면 댁이 직접 인터넷 뒤져서 찾아보거나 평생 모른 채 살라고? 이분은 작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편집자는? 편집자에게는 할 말 없고 출판사 사장님께 말씀드린다. 회사 오래 보전하고 싶으면 이 인간부터 자르시라고. 로마에서 유통되는 동전을 값어치 높은 순서대로 보면 아우레우스(금화)→데나리우스(은화)→세스테르티우스(청동화)→두폰디우스(청동화)→아스(구리화)→세미스(구리화)→콰드란스(청동)다. 요기까지 알려주면 끝? 아니다. 더 들어가야 한다. 이번에는 교환 비율이다. 가장 많이 쓰이던 1세스테르티우스는 2두폰디우스고 4아스이며 8세미스고 16콰드란스다.이제 1세스테르티우스의 가치를 알려줄 차례다. 1세스테르티우스는 현재 가치로 대략 2유로화로 2700원 정도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 로마의 소비자물가지수를 보자. 올리브유 1L는 3세스테르티우스이니 6유로가 되고 한국 돈으로 8100원이다. 식사용 중급 포도주 1L는 2세스테르티우스로 우리 돈 5400원, 빵 1㎏은 1두폰디우스로 1350원이다. 그러니까 10세스테르티우스 정도면 중산층 가족이 하루를 먹었다는 얘기다. 그럼 공중목욕탕 입장료 1콰드란스는 지금 가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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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까지 허용"…중세 때도 금리 상한선 있었다
나는 은행에 예금이 있다. 같이 사는 여자는 은행에 대출이 있다. 요즘 같은 금리 인상기에는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한다. 받는 이자와 내는 이자 사이에 은행의 수익이 있다. 내가 직접 대출해주면 은행의 수익만큼 절약할 수 있겠지만 회수 가능성이 매우 낮은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수는 없다. 그러나 금리 인상이 마냥 달갑지는 않다. 기쁨의 증가는 아장아장 소폭이지만 근심의 증가는 진격의 거인 수준인 까닭이다.구약시대, 신(神)과의 길고 지루한 협상을 마치고 내려온 모세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부터 전하겠소. 계명을 10개로 줄였소이다.” 예나 지금이나 규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모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간통은 못 뺐소.” 모세의 말에 사람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하여간 한동안은 그렇게 10개만 지키면 됐다. 종교는 단순하게 시작해서 복잡하게 진화한다. 계명이 새끼를 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성경 출애굽기의 한 구절이 근거가 된다.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꾸어주면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교리에 따르면 생명 창조는 신의 영역이다. 해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 즉 돈에서 돈을 창조하는 것을 신의 업무에 대한 침해로 보고 금지했던 것이다.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가난은 보편이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은 항상 있었고 중세 교회는 숨통을 틔워준다. 이번에는 신명기의 한 구절이 동원된다. “타국인에게 네가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여도 가하거니와 너의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라.” 요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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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유일한 여왕…'전쟁 천재'를 이기다
한국전쟁 때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면서 날아가는 ‘쌕쌕이’ 전투기를 보며 어른들은 한마디씩 했다. “아따, 그래도 사위 나라라고 신경 좀 썼구먼.” 민도(民度)가 다소 저조하다 보니 당시 전투기를 보낸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와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나라 오스트리아를 혼동해 벌어진 에피소드다. 지금도 오스트리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낮다. 한때 유럽의 5대 강국이었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그런데 설명하기가 까다롭다. 오스트리아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합스부르크 가문과 신성로마제국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쉽다. 부르봉가와 함께 유럽의 가장 유명한 왕실 가문인 데다 주걱턱을 합스부르크 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까닭이다(엄밀하게는 아래턱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위턱이 들어간 상태). 문제는 신성로마제국이다. 중세 유럽사를 따라 여행할 때 수시로 튀어나와 사람을 괴롭힌다. 지도에도 안 나오는데 대체 어디 있는 나라야?현재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에 걸쳐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은 수백 개 점포가 입점해 있는 ‘매머드 상가’로 이해하면 된다. 이 상가 입구에 걸려 있는 간판이 신성로마제국이다. 상가에는 떡볶이 가게처럼 매장도 작고 매출도 그저 그런 점포가 있는가 하면 보석이나 명품 브랜드를 취급하는 거만한 매장도 있다. 거만한 매장은 입주자 대표회의를 구성하면서 군소 업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매장 크기가 넓고 당연히 임차료도 많이 내는 자신들만이 상가의 대표를 뽑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유력 매장들이 선제후(選帝侯)다. 이 선제후들이 뽑은 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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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후 獨(독일) 혐오…왕조명 바꾼 독일계 英 왕실
왕조(王朝)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는 업적이 아니라 얼마나 버텼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 윈저 가문의 생명력은 경이적이다.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꿩 사냥과 우표 수집 말고는 특기가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왕조사(史)의 측면에서 그는 위대한 군주였다. 추풍낙엽처럼 유럽 왕가가 몰락할 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베토벤과 바흐가 금지되고 독일산이라는 이유로 닥스훈트가 집에서 쫓겨났다. 영국 왕실에는 더더욱 최악인 게 전쟁을 일으킨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는 조지 5세의 사촌이었고, 무엇보다 영국 왕실 자체가 독일계였다. 그러나 이들은 윈저라는 부드럽고 달콤한 이름으로 성씨 세탁을 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이름만 바꾼 게 아니다. 혈통을 지워버린 조지 5세는 매일 거리로 나가 국민들을 만났고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영국 왕실에 독일 혈통이 들어온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아들이 없었고, 왕위는 메리의 여동생 앤이 물려받는다. 구교와 신교가 엎치락뒤치락 피를 주고받는 일이 지긋지긋했던 영국 의회는 왕의 혈통을 신교로만 잇는 법을 통과시킨다. 그러다 보니 앤의 후계자로 불려온 것이 독일의 하노버 공작이다. 영어가 서툴러 신하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했던 이 사람이 조지 1세로 하노버 왕조를 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왕조의 이름이 바뀐다. 여왕의 남편 앨버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의 독일인이었고, 이 이름이 윈저 왕가의 바뀌기 전 왕조명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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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메카 가는 길은 천년의 대박 아이템
지금은 관광으로 먹고살지만 베네치아는 한때 세상의 물류를 쥐고 흔들던 해상 제국이었다. 15세기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베네치아의 알짜 사업이 순례선단 운용이다. 물자 대신 사람을 실어 날랐으니 그게 그거긴 하지만 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 파편을 모신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기독교도들의 꿈을 사업으로 승화시킨 ‘촉’하나만은 알아줄 만하다. 물론 이전에도 순례자는 있었다. 선박을 이용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루트도 존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순식간에 업계 1위를 달성한다. 비결은 베네치아만의 독보적 순례 패키지였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쉬운 시대가 아닌 데다 절차는 복잡하고, 순롓길에 오른 동안 몇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 리는 순롓길. 이에 베네치아는 여행에 필요한 각종 통행증과 허가증, 그리고 숙박과 통역 등의 서비스 일체를 제공했다. 여행 허가증은 셋이다. 교구 사제가 발행하는 허가증, 교황이 발부하는 허가증, 그리고 마지막이 시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이다. 교황의 허락 없이 순례를 갔다가는 파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를 발부받으려면 로마까지 발품을 팔아야 한다. 기독교도가 맘루크 제국까지 허가증을 받으러 간다? 명백히 미친 짓이다. 베네치아 패키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이 중 교구 사제 허가증만 받아오면 됐다. 베네치아는 교황과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을 책임졌고(수수료가 오간 것은 물론이다) 순례자가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순례선단 사업 독점 150년 동안 매년 수천 명이 순례를 위해 베네치아를 찾았다. 1인당 운임은 그 시기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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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하면 세금 면제"…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과 면세 카드
그리스도교는 일요일에 예배를 본다. 유대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는다. 이슬람의 대예배일은 금요일이다. 그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무얼 할까. 서로 싸운다. 내내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말하지만 그게 지켜지는 일은 별로 없다. 자신들이 죽여놓고 신의 승리라고 말한다. 종교 때문에 싸우는 건지 싸우기 위해 종교를 개발한 건지 모르겠다. 셋 중 가장 최신 종교가 이슬람이다. 무함마드가 마흔이 되던 610년 첫 번째 계시가 들려온다. 산에서 돌아온 무함마드는 아내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다섯 살 연상인 아내는 기뻐하며 무함마드가 민족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포교 성적은 형편없었다. 1년 동안 무함마드의 말에 넘어간 사람은 가족, 친구, 친척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하인까지 70여 명이 전부였다. 보험판매업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팔고 난 뒤부터가 진짜 실력이다. 포교도 마찬가지. 70여 명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얼굴을 봐서 그냥 믿어주기로 했을 뿐이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친척이니까(심지어 숙부도 무함마드가 하는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일단 무함마드의 설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맞지 않았다. 약탈과 보복 전쟁이 일상인 사막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아랍인은 과음(過飮)과 과음(過淫)으로 불안을 잊었다. 그런데 도덕적이고 순종하는 삶이라니. 게다가 무함마드가 하는 이야기는 별로 신선하지 않았다.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지금의 예멘 지역)에 ‘힘야르’라는 왕국이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후 525년까지 존속했는데, 이 왕국이 유대교를 믿는 왕국이었다. 왕국 바로 위가 무함마드가 살던 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