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예루살렘이 이슬람 성지인 이유
621년 승천해 선지자 말 듣고 메카 복귀
이슬람 3대 성지는 예루살렘·메카·메디나
이슬람은 종교 공동체가 국가로 발전
천사의 계시 기록한 '쿠란'이 구심점 역할
200년 만에 3개 대륙에 걸친 제국을 건설한 이슬람인생에서 행운은 보통 하나씩 온다. 반대로 불행은 하나만 달랑 오는 경우가 드물다. 보통 둘 셋이 겹치는데, 대부분의 인생은 이 대목에서 무너지거나 망가진다. 무함마드에게도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그가 마흔아홉 살 무렵인 619년 아내인 카디자와 숙부인 아부 탈립이 연달아 사망한 것이다. 아내가 경제적·심리적으로 무함마드를 받쳐주었다면 숙부는 정치적 바람막이였다. 그가 주창하던 유일신 사상과 알라 앞의 평등은 이제 칼이 되어 무함마드에게 돌아온다. 무함마드는 살기 위해 메카를 탈출하지만 메카 귀족들이 자비롭게 이를 보내줄 리가 없다. 추격대가 따라붙었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알라의 자비로운 손길은 여러 번 무함마드를 감싼다. 동굴에 숨었더니 거미가 와서 그 앞에 거미줄을 친다든지 하는 식인데, 상금에 환장한 칼잡이들이 단지 그 이유로 동굴을 지나쳤다는 건 좀 믿기 어렵다. 하여간 그는 탈출에 성공했고 메디나에 안착한다. 율리우스력으로 대략 622년 7월 2일인데 ‘헤즈라’라고 불리는 이날은 이슬람교도들에게 매우 신성한 날이자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이슬람력은 우리나라로 치면 지금은 잘 안 쓰는 단기(檀紀)인데 한민족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을 단군의 고조선 건국 기준으로 한다. 기원전 2333년이 단기 1년으로 2024년은 단기 4357년)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로얼마 안 가 무함마드 세력과 메디나 원주민인 유대인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처음 유대인은 무함마드를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알았다. 똑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를 드렸고 교리도 엇비슷했다. ‘이단(異端)’이라는 표현이 있다. 끝이 다르다는 의미로 종교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교리 막판에서 무함마드는 자신이 알라가 보낸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했고 유대인들은 이에 예민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가 불자 무함마드는 예배 방향을 메카 쪽으로 돌린다. ‘댁들과 내 종교는 다르다’는 공식 선언인 셈이다. 메디나에 도착했을 때 무함마드는 예루살렘 방향으로 기도를 했다. 단지 유대인과의 일시적 우호 관계를 위해서였을까. 명색이 선지자이자 신앙의 지도자인데 그런 치사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 헤즈라 1년 전인 621년 무함마드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기도하는 도중에 공간 이동을 했고 거기서 하늘로 올라가 알라와 예수와 이전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다시 메카로 돌아온 것이다. 무함마드의 최후로 잘 못 알려진 승천(昇天)설은 바로 이 체험을 말하며 공간 이동한 사원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 터다. 예루살렘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의 3대 성지다.울면서 떠난 메카, 웃으며 돌아온 무하마드어느 시대나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재앙이다. 정확히 말하면 증가라기보다 외부 ‘유입’인 이 상황은 해당 지역의 주거와 식량 사정을 급속하게 악화시킨다. 제주 4·3 사건의 원인 중 하나가 해방 후 급격한 동포들의 귀환이었다. 식량은 부족했고 불만은 쌓였고 미 군정은 강압적이었다.621년 승천해 선지자 말 듣고 메카 복귀
이슬람 3대 성지는 예루살렘·메카·메디나
이슬람은 종교 공동체가 국가로 발전
천사의 계시 기록한 '쿠란'이 구심점 역할
수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무함마드는 스스로가 원인 제공자인 동시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주택은 유대인과의 사소한 충돌을 확대해 그들의 집을 빼앗는 것으로 해결했다. 식량은 메카를 출입하는 대상을 털어 해결했다. 메카의 귀족들이 보복의 칼을 뽑아든 건 당연한 일이다. 625년 봄 메카 병력 3000여 명의 메디나 침공으로 시작된 메카-메디나 갈등은 두 세력이 모래를 피로 적시며 승패를 교환한 끝에 무함마드의 최종 승리로 마무리된다. 전쟁을 시작한 지 7년 만이었다. 메카를 점령한 무함마드의 일성은 강렬했다. “오늘 이후로는 오직 이슬람교도만 이 도시에 들어올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을 믿지 않는 자가 이 도시에 들어온다면 그 대가는 죽음으로 치르게 될 것이다.” 무함마드의 이 선언은 현대까지 이어지며 이슬람과 서방의 갈등하는 시원이 된다. 무함마드는 632년 마지막으로 메카 순례를 떠났고 그곳에서 죽는다. 사인은 암으로 추정된다.종교 집단이 국가로 발전한 이슬람 메디나로 도망쳐서 사망할 때까지 불과 10년 동안 무함마드가 이룬 업적은 경이 그 자체다. 그는 이 짧은 기간 아라비아 전역을 이슬람으로 통일했는데 유목민족 특유의 대세 쏠림 현상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의 팽창 드라이브는 더욱 거세진다. 635년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함락을 시작으로 사산조페르시아를 무너뜨렸으며, 예루살렘을 접수했고,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쳐들어갔다. 711년에는 북아프리카를 시원하게 가로질러 이베리아 반도까지 점령했는데 이로써 이슬람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에 걸친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 중 하나가 된다. 이슬람은 종교 공동체가 국가로 발전한 매우 희귀한 사례다. 그리고 그 성장에는 아주 특별한 구심점이 있었다. 쿠란이다. ‘읽다’ ‘읊다’라는 뜻인 쿠란은 무함마드가 천사에게 받은 계시를 기록한 책인데, 무슬림(이슬람교도)은 이 경전을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지금도 글자 그대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