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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패전 후 돈값 추락…우표 사는 데 아파트 살 돈 필요

    역사적으로 독일은 돈이 휴지 조각이 돼버리는 것을 경험한 나라다. 그 여파로 유럽 재정위기가 몇 년째 계속되지만 독일은 여전히 물가 상승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돈 풀기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영국 파운드나 프랑스 프랑, 이탈리아 리라화에 비해 매우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패전으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패전에 따른 전쟁배상금 지급을 위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불가피했고, 정부가 세금을 크게 올릴 것이라는 예상으로 민간자본의 해외 도피가 발생하면서 화폐가치 안정성이 크게 떨어졌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1파운드는 20마르크 선에서 교환됐지만 1918년 12월 파운드당 43마르크로 화폐가치가 추락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엔 파운드당 60마르크가 됐고, 그해 겨울엔 파운드당 185마르크까지 폭락했다. 이어 1923년 파운드나 프랑, 리라와 마르크화를 교환하기 위해선 외국 통화당 무려 1조 마르크가 필요했다. 전국의 133개 인쇄소에서 1783기의 인쇄기가 밤낮으로 돈을 찍어댔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기에 돈은 언제나 모자랐다.당시 달러 대비로 마르크화 가치 추이를 복기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이마르공화국의 화폐인 파피어마르크가 종이(파피어)라는 이름처럼 휴지 조각이 돼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 달러당 4.2마르크였던 마르크화 가치는 전쟁 이후 달러당 8.9마르크로 떨어졌고, 1920년 달러당 14마르크가 됐다. 불과 1년 뒤에는 달러당 64.8마르크로 하락한 뒤 1922년엔 달러당 191.8마르크로 추락했다. 1923년에는 ‘천문학’에서 쓰일 법한 단위들이 동원된다. 1923년 1월 7260마르크에서 4월 2만 마르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가뭄·돌림병 등 전례 없는 자연재앙 발생…경신대기근으로 100만명이 아사 추정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처참한 살육 현장을 겪은 조선 백성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양 난을 겪으면서 많은 농토가 유실되고, 노동력도 부족했던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인구의 4분의 1인 무려 100만 명의 아사자가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경신대기근은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기후변화의 산물이란 주장이 있다. 실제로 실록 등 사료를 보면 전례 없는 자연 재앙들이 발생했다.1670년 초봄부터 한양에 눈과 우박이 내렸고, 3월에는 평안도에 운석이 떨어졌다. 1670년 5월 4일 평양 감사인 민유중은 편지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한여름인 7월에도 우박·서리·눈이 전국에 내렸고, 함경도의 피해가 제일 심각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9월에는 목사가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면서 남해안 지역의 식량 지급을 요청했다.(현종실록)다행히 정부는 신속한 조처를 취했다. 벼 등을 운반했고, 유배수들을 육지로 옮겼으며, 세금 감면과 특별 과거를 실시했고,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5월에 이르러서는 경기도를 시작으로 황충, 즉 메뚜기떼들의 공격이 극심했다. 7월 함경도에서는 황충과 함께 참새(黃雀) 1000만 마리가 들판을 덮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병충해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었다.그러자 조정도 위기 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기근 대책을 모색하는 1670년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허적은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경성 백화점들 활황…외제 사는 조선인 수두룩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대중 잡지인 ‘별건곤’은 1929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경성우편국을 끼고 돌아서면 요지경 같은 진고개다. 하라다 상점에 들어서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그래도 놀라지 말라. 반수 이상이 조선남녀다. ( … ) 미스코시에 들어가니 아래층은 음식과 과자를 팔고, 이 층으로 가니 거기는 일본 옷감뿐이더라. 삼 층에 가니까 장난감, 학용품, 아동복, 치마감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니 진고개 2정목, 3정목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나는 조선 부인들….”1920~1930년대 당시 경성의 번화가인 혼마치(서울 명동 근처)에선 거리를 구경 다니는 혼부라(혼마치와 어슬렁거리다의 합성어)가 득시글거렸다. 백화점 구경을 즐기는 주 고객인 여성과 학생에 대한 당대 언론인들의 시각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별건곤’은 “조지야 하라다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이라며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미스코시, 오복점(기모노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다”며 “어쨌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보다”라는 비꼼과 함께.당시 ‘모던 걸’(물론 ‘모던 보이’도)은 사회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혼마치 상가의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당대인의 묘사와 평가도 늘어난다.이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왕과 양반들, 북벌론에도 모화사상 못 벗어나…청나라 요청으로 파병…'나선정벌'로 변질돼

    인조 때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박연)는 귀화해 무기 제조 등에 참여했다. 이어 표착한 동인도회사의 직원 하멜 등도 군기 개발에 참여했고, 효종도 활용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난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헤이룽강(아무르강) 일대에 진출해 부가가치가 높은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등의 자원을 획득하고, 식민단을 정착시켜갔다. 청나라도 북진하면서 북만주의 삼림과 헤이룽강 상류의 다구르족, 예벤크족 등 소수 종족과 전투를 벌였다.따라서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면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전술적인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을 뿐 모화사상은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양반 사대부라 해도 정치생명과 직결된 모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없다. ‘북벌론’은 명분과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의식과 필요한 행위일 수 있지만 실천이 아닌 명분상의 자존심 회복, 정권 안정이라는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훗날 숙종과 대원군처럼 망상과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선례를 남겼다.가정해 본다. 만에 하나 북벌론이 추진됐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수많은 백성이 살육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어쩌면 독립마저 상실하고 청 제국의 일개 성(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역사에서는 때때로 우연이 발생한다.북벌 준비는 ‘나선 정벌’이라는 기묘한 사건으로 변형됐다.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며 패배하던 청나라는 북벌론으로 강해진 조선군의 화포 등 무기 수준을 시험하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효종과 서인들의 실천 의지에 의구심 생기는 북벌론 국론 통일에는 효과적 수단…추후 나선정벌로 연결돼

    효종의 ‘북벌론’은 비록 꿈이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이성계는 1388년 음력 5월 하순, 압록강가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탄 말의 눈빛과 꼬리짓, 울음소리는 어땠을까. 이후 이종무가 1419년 잠시 대마도에 발을 디뎠고, 세종 때 김종서와 최윤덕은 멀리서 그림자만 봤을 뿐이다. 이후 조선은 ‘남정북벌’을 꿈꾼 적은 없다. 한정된 인식과 무능함, 현실에 안주하는 습성 때문이었다.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에 포위된 채 울음을 터뜨린 인조는 포로로 끌려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멸한 뒤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의 실상효종의 ‘북벌론’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 효종을 비롯한 서인 일파들은 정말로 실천할 의지가 있었을까.함께 포로생활을 겪었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청을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효종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인은 국력과 국제관계의 실상을 외면했고, 전쟁의 참상과 백성의 희생을 가볍게 여긴 죄로 역사와 백성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반청정책과 자주성의 표방은 피해의식과 복수심, 자주라는 감성을 이용해 정책적인 과오를 반전시키고 면피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재야의 거두이자 권력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초호황기 102층 설계…대공황 여파로 '공실' 고통

    1920년대 미국 경제는 장밋빛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체제로 운영되던 경제가 정상화되면서 내수 소비가 급증했다. 1920년대 미국 공업생산은 약 90% 증가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자동차와 가전제품 같은 내구 소비재 소비가 늘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난 반면 물가는 안정됐다.1920년대에 사치품이었던 자동차는 범용제품이 됐다. 1914년 자동차 생산은 126만 대 수준이었지만 1929년이 되자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560만 대를 생산해냈다. 1927년 포드자동차의 히트 모델 ‘모델T’는 1500만 대나 판매된 뒤 단종됐다. 1918년 30만 대의 자동차가 등록됐던 캐나다에선 1929년까지 190만 대의 자동차가 보급됐다. 자동차산업은 철강, 고속도로, 모텔, 중고차 시장 등 다양한 2차시장을 창출했다. 정유, 유리, 철강, 고무산업은 덩달아 발전했다. 1925~1929년 미국의 제조업체 수는 18만3877개에서 20만6663개로 늘었다. 이들 업체의 생산액은 약 600억 달러에서 700억 달러로 커졌다.이 시기 라디오도 보급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라디오를 가진 가정은 흔치 않았지만 1929년에는 미국 내에서 1000만 가구 이상이 라디오를 보유했다. 유성영화는 무성영화를 대체했다. 화학산업도 정점을 이뤘다. 대형 백화점들은 지점을 계속 늘렸고, 통신판매 같은 새로운 유통 방법이 개발됐다. 개인 소득 증가에 따라 당시 하이테크 전자산업이던 냉장고와 세탁기 등 전자제품 소비도 급증했다. 백화점의 고가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월가는 1923년 발생한 순간적인 조정기를 빼곤 1922~1929년까지 초호황을 누렸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전비 마련을 위해 공모한 ‘자유채권’에 참여해 짭짤한 재미를 봤던 투자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한민족이 백의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민족은 역사 이래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백의민족 신화는 어느 정도 진실일까. 오늘날 많은 한국인은 한민족이 흰옷을 숭상하고, 즐겨 입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로 흰옷을 좋아하고 흰옷만 고집했는지를 냉정히 따져본 적은 거의 없다.최공호 박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백의민족에 대한 관념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포함한 일제 강점기의 여러 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백의민족’ 개념이 부각된 것은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 미술에 대해 ‘색채 결핍론’과 ‘비애미’를 들고나온 데 대한 반론의 성격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정말로 흰옷 착용이 한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특질이었을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이후 빈번하게 발견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에 “부여인은 흰색 옷을 숭상해 흰옷에 소매가 넓은 포와 바지를 입는다”는 기록이 있다.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복색은 흰색”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이후 1487년 조선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동월의 저술인 조선부에 이르기까지 흰옷은 외국인의 시선에 한민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포착됐다.이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백색 패션을 선호해서 의도적으로 추구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 등 현재까지 전하는 전근대 시기 시각자료에선 흰옷에 대한 숭상을 확인하기 어렵다.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의 적지 않은 문헌에서 “한민족이 흰옷을 피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전하는 점이다. 19세기 충청 지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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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관계 눈뜬 소현세자 급사, 포로·환향녀 냉대…전후에도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갇혀 망국의 길로

    조선 포로들의 속환가가 초기에는 남자 은 5냥, 여자 은 3냥 수준이었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 남다른 조선 사람들이 선양을 계속 찾아오자 가격은 150냥에서 250냥 정도까지 올랐고, 심지어 한 고위관리는 아들을 위해 1500냥을 지급할 정도였다. 결국 재력 있는 양반 사대부의 포로들은 귀환했지만,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서 2000여 명에 그쳤다. 그나마 대다수 백성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자들은 노예로, 여자들은 첩이나 창기로 전락했다. 그 후예들은 청나라 사람, 중국 사람들로 변했다.관광단이나 사업가, 고구려 유적 답사에 나선 학생들은 선양의 청나라 ‘고궁’과 ‘백탑’에서 선조들의 참상을 몰라 숙연함과 반성하는 마음을 갖기보다 웃고 즐긴다. 식민지 백성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역사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다.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귀환한 포로를 ‘영웅’으로 환영하는 나라는 자주적이고, 성공한 국가다. 조선은 그 반대였다. 8년 만인 1645년 돌아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한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 2개월 만에 급사했다. 상황과 세자의 시신 상태, 인조의 태도, 당쟁을 고려해 ‘독살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