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개화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문명개화·자주독립 명분으로 군사정변 시도

    전근대 한국은 내부 모순이 폭발 직전까지 축적됐어도 혁명을 유발할 요인은 부족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갖춘 자연 재앙과 외부 침략이 거의 없었다.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직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는 부족했고, 혈연 중심의 향촌 공동체로 구성됐다. 특히 조선은 체제 유지를 절대가치로 표방한 성리학과 모든 권력을 그물망처럼 장악한 유림 집단 때문에 혁명의 발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는 개화기의 제2단계 과정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훗날 혁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 임시정부는 이 정변을 ‘갑신혁명당의 난’으로 정의하면서 ‘혁명’으로 평가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지금 종로의 조계사 옆인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수 개화당원이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요청과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군사정변을 시도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선언하고, 강령 등 실천 방법까지 선포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군사력에 패배해 ‘삼일천하’로 끝났다. 주도자들과 참여자들은 살해, 망명, 처형, 투옥, 유배를 당하고,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다. 무려 500~600여 명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역사학자로서 궁금하고, 한 인간으로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실패 위험성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정변’을 계획했을까. 어떻게 학습하고 이론을 확립하고, 세력을 규합하며 훈련했을까. 왜 미숙했다고 비판받은 방식으로 추진하고 참혹한 실패를 겪었을까. 먼저 그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시킨 조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2번에 걸친 ‘양요(프랑스 및 미국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오군란으로 청·일본 역학관계 복잡해지며 조선의 개혁 좌절되고 청·일 전쟁 명분 제공해

    집권 세력은 위기의식을 가졌지만 멸망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예상하지 않은 것 같다. 13년 정도 일찍 외세에 개방당한 일본은 개혁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고, 국제관계도 그레이트 게임의 주변부로 움직이면서 변화무쌍했다. 그 때문에 조선에 반전의 시간과 기회는 있었고, 실제로 36년 뒤에야 일본에 합병당했다.명성황후 정권의 외교정책과 외교관 등 외국인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개혁과 구국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판단된다. 1876년에 1차 수신사를 파견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충격받아 <일동기유(日東記游)>를 써 정부에 보고했다. 1880년 6월에는 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을 파견했고, 12월에는 정부 조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외교·내정·군정 등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이어 1881년 4월에는 ‘조사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신사유람단’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이때 62명은 74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분야를 치밀하게 조사한 뒤 100여 책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중간인 5월에는 장교를 양성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9월에는 ‘영선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해 청나라의 양해하에 군수 공장 등에서 화약과 탄약 제조법을 비롯한 군사 분야의 기술과 외국어를 배우게 했다.한편 자주외교를 표방하면서 청나라에는 책봉 체제를 없애고 근대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으며, 일본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 조항을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 국교 수립을 추진하고, 김홍집이 가져와 개혁과 외교정책의 모델로 삼은 <조선책략>을 보급했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종, 일본과 불평등 병자수호조약 체결…개방·개혁정책 펼치며 대원군과 차별화

    개항 후 한국의 지성계와 정계는 친일·신진·개화·진보 세력과 친청·기득·쇄국·보수 세력으로 분리돼 갈등 또는 협력했다.1910년 멸망할 때까지 병인양요부터는 44년, 강화도 조약부터는 35년간 소위 강산이 세 번 이상 변했다. 이 격렬한 역사의 전환기는 참여한 인물과 주요 사건을 근거로 구분하면 총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75~1882년 운양호 사건부터 임오군란까지다.고종과 명성황후가 장악한 신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와 일본의 군사적 위력을 의식해 1876년 2월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1811년 통신사가 끊어진 뒤 65년 만에 교린 외교가 아닌 근대 외교가 시작됐다. 12조로 된 이 불평등조약엔 문제점이 많았다. 제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원산, 인천)를 20개월 내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인천은 청나라를 의식한 곳으로, 한양으로 침투하는 데 최단 거리다. 원산은 동해 진출에 적합한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남진 저지에 적합한 장소다. 이 조약이 경제적 이익, 조선 지배뿐만 아니라 국제관계, 해양의 중요성 등을 고려한 장기정책이었음은 청일전쟁·러일전쟁·독도 문제 등에서 확인됐다. 또한 일본은 제7조를 통해 조선 연안을 측심하고 측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군사작전의 교통로는 물론 상륙 지점을 손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이 조약으로 패배감은 물론이고, 개항과 서구문명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확대 재생산됐다.반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제1조인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은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500년 가까이 조공과 책봉체제에 묶인 중화적 질서를 탈피하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두 번의 '양요' 거치며 쇄국정책 옳았다고 착각…4년 후 일본 공격 대비하는 교훈조차 못 얻어

    미국은 1847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포경선들을 북태평양 어장으로 진출시켜 러시아와 부딪쳤다. 1853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강행해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청나라, 필리핀 등과 캄차카 반도, 쿠릴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은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서해안의 모든 관청에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와 신도를 죽였다.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이를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두 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동 입구인 염창에 정박하고, 다음날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하자 도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곧 산둥으로 회항한 함대는 준비를 마친 뒤 10월 14일 군함 네 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어 벌어진 문수산성 전투에서 포수와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 지역주민과 합동작전을 벌인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를 약탈했다.그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 이 사건을 빌미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한 군함 다섯 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원군, 세도정치 철폐 등 기득권 일소 성공…쇄국으로 세계질서와 열강 움직임 못 읽어

    조선은 백성에게 가난과 질병, 부패와 공권력의 폭력을 안긴 불행한 체제였다.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지속됐다. 소수 가문이 왕권을 능가하는 정치권력과 경제, 문화 등을 장악했고, 관직 매매 등 부패를 일상화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일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정착했다. 1863년 이런 상황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역사에 등장했다.그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중앙과 지방에 포진한 세도정치의 주역과 동조 세력을 숙청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정치권과 군사권을 분리했다.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자 재산권 및 권력투쟁과 직결된 수많은 서원을 47개만 남겨두고 철폐했다. 양반들의 특권으로 병역 대신 부과했던 군포를 다시 거둬들였고, 사창제도 등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런 개혁정책들은 구권력의 인적, 기득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고, 자신을 중심으로 신권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백성도 환호했다.하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추진한 경복궁 재건은 개혁을 좌초시켰다. 백성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재정 부족 때문에 발행한 당백전은 초기 단계에서 화폐경제의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세금을 걷는 데 차질이 생겼고, 백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원납전을 부과해 관청과 지주들의 자진 기부를 유도했지만 결국 백성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100년 가까이 성장한 실학자들의 존재와 연구, 정책 대안을 소홀히 했다. 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이 서양문물 적극 흡수하며 위기극복 할 때 조선은 권력투쟁 등으로 급변하는 정세 못읽어

    조선 통신사들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됐는데, 한 번에 300~500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일본의 변신과 발전을 보면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오랑캐라는 편견과 패전국이었다는 반감 때문인지 성리학의 우월감과 개인의 문학적 능력을 자랑하는 데 공력을 기울였다. 물론 조엄 등 일부는 꼼꼼히 상황을 기록하고, 귀국 후에는 문물을 도입할 것을 역설했지만 ‘북학’을 표방한 연행사 등과 달리 ‘남학’을 자처하지 못한 채 조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19세기 중반 무렵 서양 세력은 동아시아 세계를 유럽의 무역망,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서양의 우세한 무력, 불평등한 조약, 질 높은 상품 등과 대응해 방어와 역전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1853년 미국 군함(흑선)이 에도에 가까운 우라가에 정박해 포함외교를 개시했고, 1854년에는 요코하마에서 ‘일·미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이어 1855년에는 러시아와 ‘일·러 화친조약’을 맺었다. 사할린에 이미 진출한 러시아와는 1791년부터 지정학적으로 숙명적인 관계였다. 바쿠후는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해 1799년에 쿠릴열도를 ‘직할령’으로 지정했고, 1808년에는 마미야 린조를 사할린 지역에 파견했다. 그는 아무르강 하구까지 탐사해 오호츠크해와 북태평양 일부까지 포함된 지도를 만들었다. 김정호는 1861년에 이르러 ‘대동여지도’를 그렸다. 바쿠후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1854년 네덜란드에 군함과 장비를 발주했고, 1855년 10월에는 교관단이 입국해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르쳤으며, 1857년 9월 발주했던 군함이 드디어 도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보다 13년 먼저 외세 맞닥뜨린 일본…항구 개방하고 선진 서양문물 적극 수용

    1866년 프랑스 함대 3척이 영종도와 강화도를 거쳐 서울의 양화대교까지 정찰하고 청나라로 귀환했다. 다시 7척의 전함을 끌고 와 600명의 해병대를 상륙시켜 강화도를 파괴하고 약탈했다. 1871년에는 미국이 아시아 함대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대로 강화도를 공격해 군인과 백성 300여 명을 죽였다.이에 앞서 일본은 1853년 미국이 파견한 흑선(군함)의 포함외교에 경악했고, 1854년에는 오키나와와 유·미(琉·美) 수호조약을 맺고 온 미국과 ‘일·미 통상조약’을 맺어 개항을 선택했다.의아하다. 불과 13년 앞서 선진 외세를 경험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켰고, 1910년에는 식민지로 만들어 아직도 분단의 비극이라는 멍에를 못 풀고 있다.일본은 무슨 일을 어떻게 벌여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일까. 일본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과 분명히 달랐다.첫째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종류와 성격이다. 전통신앙을 계승했고, 18세기 후반에는 국학을 발전시켜 신도사상과 천황제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효와 인, 근왕정신(충)을 중요시한 조선의 성리학과 달리 천황과 주군에 충성하고, 의리와 명예를 준거가치로 삼았다. 불교는 ‘선(禪)’을 매개로 무사도와 결합했고, 백성의 실생활과 밀접해져 주도적인 사회사상 역할을 했다. 비록 16세기 후반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부 지역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도 경시할 수 없다.둘째,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현재 오이타현 지역에서는 1582년 4명의 소년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고, 1613년 센다이번이 파견한 유럽 사절단은 범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와 쿠바를 거친 뒤 대서양을 지나 에스파냐에 도착했다. 그들은 로마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존 세력의 저항과 사회체제 경직성 벽 막혀…북학파 이상과 정책제안, 부분적 개선에 그쳐

    만약 청나라, 일본, 러시아를 통해 서양의 평등사상과 독립 의지, 발전된 과학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필시 세계의 존재와 문화의 다양성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관념론을 벗어나 실용론을 추구했을 것이다. 또 지구와 우주의 인식을 통해 거시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조선의 정체성도 더 자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익 박지원 안정복 유득공 등은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발견하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재인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과 정책제안은 부분적 개선은 가져왔지만, 그 또한 왕을 비롯한 주류의 이익이 반영된 결과가 컸다.북학파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첫째, 주류 집단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세계관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역동성을 상실해 400년 가까이 진보와 혁신의 필요성에 눈감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신사상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했다.둘째, 신분제 사회체제의 경직성이다. 신분에 따른 착취와 예속의 구조가 심각해 자발적인 생산과 창조가 어려웠다. 산업과 상업 등이 미발달했고, 자발성을 망각한 백성은 의욕을 잃은 생산자들이었다. 이익이 정리했듯 지주와 농민, 양반과 상인, 출사자와 비출사자, 적자와 서얼 사이에 관직과 토지를 놓고 숙명적인 이익 충돌이 벌어지는 구조였다.셋째, 추진 집단의 한계와 능력 부족이다. 소외 집단이면서 서얼인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력과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심지어는 정약용도 고위관리나 대토지 소유자가 아니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를 유도할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