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포르투갈의 전성기
할아버지 엔히크처럼 바다에 집중
탐험가들을 서아프리카로 남진시켜
바우톨로메우 디아스 인도양 항해 성공
인도길 열리기 직전 콜럼버스 美 대륙 발견
제안 걷어찬 주앙 2세, 속 쓰려 하기도
“0에서 1까지의 거리는 2에서 100까지의 거리보다 길다.” <탈무드>에 나오는 격언인데 보통은 시작이 중요하니 일단 뭐가 됐든 하고 보라는 은유로 해석된다. 진화생물학자 린 마굴리스(1938~2011)는 수백 년 내려온 이 설명을 뒤집었다. “무생물과 박테리아 사이의 간극은 박테리아와 사람 사이의 간극보다 더 크다.” 경구가 은유가 아니라 직유라는 얘기다. 실제로 무생물에서 생물을 탄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화학적 과정을 거치기에는 지구의 역사가 너무 짧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굴리스의 말은 창조론자들을 고무시켰다. 과학자의 이론이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에 힘을 실어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녀의 연구는 과학의 영역에도 도움을 주었다. 스웨덴 화학자 아레니우스(1859~1927)는 우주에는 별빛의 압력에 의해 공간을 떠다니는 살아 있는 포자들이 충만하다는 가설을 제기했는데 - 그래서 이게 지구에 떨어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 이 주장이 탄력을 받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범종설(panspermia)을 둘러싼 시비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실력도 안 되는 과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바스쿠 다가마, 마젤란을 배출한 최고의 해양 학교마굴리스 여사의 말은 역사에도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하다는 얘기다. 물론 이때 ‘거리’는 ‘크기’로, 동사는 ‘길다’ 대신 ‘크다’로 바꿔 써야 어울리겠다. 시작,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1’이라는 구체적 성과가 있기 전까지 시작의 의미나 가치는 없다. ‘1’이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거대한 것을 추진했든 결국 0인 것이며 1을 달성한 뒤에야 의미가 생긴다. 그래서 누군가의 첫걸음 그리고 그 최초의 성공은 후발 주자들의 총합보다 크거나 최소한 같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딱 그런 인물이다. 그가 포르투갈 남서쪽 해발 60m에 자리한 사그레스의 해양 연구소에서 보낸 40년 인고의 세월이 없었다면 인도로 가는 길도 아메리카의 발견도 한참 뒤의 일이었을 것이며, 소국(小國) 포르투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연구소 부설 항해 학교에서는 걸출한 탐험가를 다수 배출했다(정확히는 그들이 그 학교 출신이라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 바스쿠 다가마 그리고 마젤란 등이 이 학교를 빛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다.아폰수 5세, 가장 큰 업적은 뛰어난 아들을 낳은 것스타트를 잘 끊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다가 아니다. 그다음도 중요하다. 누군가 이어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성공은 빛이 바래고 영광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엔히크의 뒤를 잇고 결과적으로 그의 명성을 더욱 드높인 인물이 종손인 주앙 2세다. 주앙 2세의 아버지 아폰수 5세는 정치적 바보였다. 어려서는 삼촌에게 휘둘렸고 나이 들어서는 배다른 형제의 손 안에서 놀았다. 왕권이 수직으로 추락하는 동안 그는 희한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십자군놀이다. 아폰수 5세는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왕국을 정복해 신의 영광을 실현하겠다는 열망에 빠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정복 활동이라고 유능할 리 없다. 아폰수 5세는 서아프리카 해안 도시 몇 개를 정복하고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정복자’라고 불렀다. 원정으로 날린 비용을 다 더하면 정복한 도시보다 더 많은 도시를 세웠을 것이다. 이웃 나라 왕위는 날로 먹으려 했다. 이웃 카스티야왕국을 손에 넣기 위해 국왕의 이복동생 이사벨에게 청혼했다. 경쟁자는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였다. 스무 살 차이에 이미 왕권을 이어받을 아들까지 있는 아폰수 5세가 이사벨의 눈에 차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사벨의 선택은 페르난도였고 이후 둘은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몰아내 레콩키스타(탈환)를 완료한다. 아폰수 5세는 퇴위와 복귀를 반복한 끝에 초라하게 사망했다.주앙 2세, 숙조부의 길을 따라 대서양으로아들은 아버지와 많이 달랐다. 주앙 2세는 비대해진 귀족 권력을 문자 그대로 모조리 때려잡았다. 처남을 처단했으며 아버지의 총신에게도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다. 포르투갈 귀족의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로 가혹한 숙청 작업을 마무리한 주앙 2세가 집중한 것은 바다였다. 엔히크 사후 20여 년 만에 재개된 포르투갈의 해양 탐사에 다시 시동이 걸렸고, 왕의 명을 받은 탐험가들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진을 계속했다. 1484년에는 디오구 캉이 콩고강 입구를 지났고 이어 오늘날 나미비아의 케이프 크로스를 통과했다. 1488년 바우톨로메우 디아스는 희망봉을 통과해 인도양 입구까지 진입했다. 그는 인도양을 항해한 ‘최초의 유럽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아버지인 아폰수 5세도 서아프리카로 많이 진격하지 않았느냐고? 그건 철 지난 기사놀이였고 주앙 2세는 정복이 아닌 탐험과 상업이 목적이었다.할아버지 엔히크처럼 바다에 집중
탐험가들을 서아프리카로 남진시켜
바우톨로메우 디아스 인도양 항해 성공
인도길 열리기 직전 콜럼버스 美 대륙 발견
제안 걷어찬 주앙 2세, 속 쓰려 하기도
인도로 가는 길이 열리기 직전 그의 혈압을 올리는 사건이 터진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통과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것이다. 콜럼버스의 기획안은 예전 자신이 발로 차버린 것이어서 속이 더 쓰렸다. 8년 전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가는 경로를 제시했지만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계획이 거의 마무리 단계이던 주앙 2세 입장에서는 굳이 투트랙으로 사업을 추진할 이유가 없었다. 1495년 주앙 2세는 40세 나이로 사망한다. 재위 14년의 짧은 통치였지만 엔히크에 이은 그의 해양 정책으로 포르투갈은 생애 최초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