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동서양 역전시킨 대항해시대

항해·선박제조 기술진 모아 체계적 연구
절벽 끝 괴물 산다는 '암흑바다' 통과에 몰두
삼각돛 '캐러벨' 만들어 거친 바다 항해 성공

"황금벨트에 상아·사금 지천에 널렸다" 소문
엔히크 "조국 부유해질 것"…바다에 매달려
캐러벨은 전장 30m 내외, 100t 미만의 기동력 좋은 소형 범선이다. 배의 크기가 작아 경제성, 속도, 조타성이 좋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좌초할 위험이 높고 적재량이 부족해 무역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Getty Images Bank
캐러벨은 전장 30m 내외, 100t 미만의 기동력 좋은 소형 범선이다. 배의 크기가 작아 경제성, 속도, 조타성이 좋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좌초할 위험이 높고 적재량이 부족해 무역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Getty Images Bank
세계경제 중심을 유럽으로 옮긴 두 개의 사건총생산만 놓고 보면 19세기 초까지도 세계의 무게중심은 아시아였다. 정확히는 중국과 인도인데, 19세기 초반 기준 두 나라의 총생산을 합치면 3400억 달러로 전 세계 총생산의 거의 50%를 차지했다. 이게 역전된 시기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유럽과 미국이 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 19세기 이전까지 중국과 인도는 내내 풍요로웠고, 유럽과 미국은 줄기차게 프롤레타리아트 지역이었을까. 총생산에서 유의할 부분이 인구다. 시대마다 전 세계 인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고, 19세기 초반에는 무려 37%를 기록했다. 이러니 총생산 액수가 높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인도까지 가세하니 총생산 절반이 가능했던 것이다. 나라 가난해도 개인 윤택하던 유럽, 반대인 중국그러나 1인당 GDP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치를 보자. 서기 1000년 서유럽 1인당 GDP 평균은 400달러였다. 중국은 450달러로 아직까지는 중국 우세다. 그러나 1500년이 되면 이 숫자가 서유럽은 771달러로 증가하는 반면 중국은 600달러에 그쳤다. 국가별 총생산액이 아니라 개인의 윤택에서 서유럽은 이미 중국을 따라잡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후의 추세다. 19세기 초반 중국이 여전히 600달러를 고집하는 동안 서유럽은 1200달러를 돌파하며 두 배 차이로 중국을 따돌렸다. 이유는 당연히 산업혁명이다. 생산성 측면에서 유럽이 거침없이 질주하는 동안 농업 중심인 중국 경제는 장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그렇다면 1500년의 동서 역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대항해시대 개막이다. 중국이 바다를 포기하고 내륙으로 들어간 사이 유럽인은 대서양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가고 있었다(실은 한 사람이 외롭게 그러나 꿋꿋하게 달렸다). 탐험가·지리학자·수학자 대거 영입한 엔히크1415년, 포르투갈은 생애 최초로 해외 식민지를 얻는다. 북아프리카의 북단 왼쪽 세우타 항구다(현재 모로코). 항구를 관리한 인물은 엔히크 왕자였다. 3개월 후 귀국한 그는 포르투갈 남단 사그레스(Sagres)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탐험가와 항해 전문가를 불러 모았다. 여기에 더해 지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를 초빙했으며 선박 제조, 항해 기구 제작자들 등 기술진도 대거 영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해양 연구소에서 엔히크는 바다와 선박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진행한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바다는 지중해가 아니었다. 당시 ‘죽음의 바다’ 혹은 ‘암흑 바다’라 불리던 모로코 서쪽, 카나리아제도의 보자도르곶이었다.

오스만제국이 동지중해를 장악하면서 대서양 진출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절반만 맞는 말이다. 그 전이라고 해서 대서양으로 나가면 사형시킨다는 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안 나갈 까닭이 없다. 안 나간 게 아니었다. 무서워서 못 나갔다. 뱃사람들은 보자도르곶이 펄펄 끓고 있고 심연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 끝은 절벽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렇게 공포와 무지가 상승작용을 한 끝에 붙은 이름이 암흑 바다다. 엔히크의 목표는 이 암흑 바다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공포심만 극복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지가 않다. 의지와 정신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파도는 높고 해류는 강했다. 조류가 대체로 육지로 향하는 반면 바람은 대부분 먼 바다로 불었다. 노잡이에 의존해 지중해를 오가던 항해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바다인 것이다. 암흑의 바다에 괴물은 없었다해양 연구소에서는 일단 배의 개량에 집중했다. 거친 바다를 견디기 위해 내구성을 강화했고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 돛대의 수를 늘려 큰 삼각돛을 달았다. 이렇게 탄생한 배가 초기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캐러벨(Caravel)이다. 1420년 최초의 탐사대가 보자도르곶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바로 돌아왔다. 조류와 바람을 배가 이기지 못했다. 배를 개량해 내보내길 반복한 지 무려 14년, 드디어 탐사대가 보자도르곶을 돌아 생환하는 데 성공한다. 왕자라는 신분, 기사단 단장이라는 막강한 재력 그리고 신앙에 가까운 집념이 빚어낸 성과였다. 대서양을 향해 ‘한 사람’이 외롭고 꿋꿋하게 달렸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엔히크가 물었다. “무엇이 있던가.” 선장이 대답했다. “그냥 망망대해입니다.” 엔히크가 말했다. “다음에는 더 밑으로 내려가라.” 1441년, 포르투갈 선단은 아프리카 대륙의 극서단인 베르데곶을 통과한다. 엔히크는 자국의 배가 희망봉을 통과하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14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사그레스에 머물렀다. 무려 40년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포르투갈의 영광 위해 살다 간 위대한 중세인무엇이 엔히크를 그토록 바다에 매달리게 한 것일까. 세우타 요새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상인들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듣는다. 모로코 내륙에서 나이지리아 분지로 이어지는 황금 벨트에는 상아와 사금이 지천이고 그곳에서는 아이들도 금덩어리로 공기놀이를 한다는, 다소 허풍이 들어간 정보였다. 엔히크는 그 황금 지대가 조국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또 하나는 아프리카에서 전설의 기독교 왕국 군주 프레스터 존을 만나 그와 함께 십자군전쟁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대항해시대를 연 위대한 인물이지만 여전히 십자군 타령을 한 그는 어쩔 수 없는 중세(中世)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이 조국을 3개 대륙에 걸친 거대한 규모의 식민 국가로 만들었으니 목표 중 하나는 달성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