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스스로 바닷길 닫은 명나라
대형 선박 등 2000여척 이끌고 항해
유럽에 힘 자랑 목적 출항…원정 성과 '미미'
100년 뒤 3척으로 떠난 콜럼버스
1492년 항해서 카나리아 제도·도미니카 발견
주앙 2세가 소식 먼저 알아…외교 분쟁 시작돼
장관이었다. 출항을 보려고 항구에 모여든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선단이 아침 햇살 아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1405년 6월 난징에서 출발한 명나라 선단은 근대 이전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재정을 소모했다는 평에 걸맞은 초호화 거대 함대였다. 기함인 뤼메이마오(綠眉毛)는 길이 150m, 폭 60m에 적재량이 무려 2만 톤이다. 이게 과연 15세기 선박 제조 기술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고(2024년 현재 대한민국 해군이 개발 중인 경항공모함의 길이는 265m, 폭은 약 43m), 여기에 60여 척의 대형 선박 등을 더하면 전체 선박 수는 무려 2000여 척(7차 원정까지의 누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부 기록에는 3500여 척)에 달했다. 승무원 수는 모두 2만7000명이었다고 하는데, 중국인 특유의 허풍을 감안해 모든 수치를 3분의 1로만 잡아도 유럽 전체의 선박 수보다 많았다. 출항의 목적은 더 놀라웠다. 그냥 자랑이었다. 당시 황제인 영락제는 그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규모와 선박 제조 능력과 풍성한 재정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 그 항해를 통해 전 세계에 유통망을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다. 만약 그런 목적으로 원정이 이루어졌다면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없었을 것이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중국인의 성취로 끝났을 것이다. 원정으로 얻은 것은 인도양 주변의 50여 개국에서 명나라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 그마저도 얼마 안 가 해금 정책으로 바닷길을 닫아버렸으니 밥상은 차려놓고 정작 수저는 들지 않았던 셈이다. 부자 함대와 빈자 함대의 대차대조표초라했다. 1492년 8월 세비야 인근 팔로스항을 출발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달랑 세 척이었다. 기함인 산타마리아호가 적재능력 150톤에 길이 23m, 너비 7.5m 정도였으니 나머지 두 척 판타호와 니냐호는 이보다 사이즈가 더 작았을 것이다. 승선 인원은 모두 90명으로 기함에 40명, 나머지 배에는 각각 25명씩 올라탔다. 100여 년 전 명나라 선단의 규모에 비하면 상어와 새우의 비율만큼 차이가 난 이 항해는 그러나 인류가 달에 간 날만큼이나 인류 역사에서 중요하게 기억된다.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 왕실 “죄수 활용해 인건비 줄여라”매끄러운 출발은 아니었다. 대서양 횡단 계획이 승인되고 콜럼버스와 에스파냐 왕실은 경비 협상에 들어간다. 3개월에 걸친 실랑이 끝에 최종 타결된 액수는 200만 마라베디였다. 어느 정도 액수일까. 어떤 역사책에는 대단히 많은 것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따져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세르반테스가 1605년 발표한 소설 <돈키호테>를 보면 하인인 산초에게 준 급료가 하루 26마라베디로 7만6923일 치 인건비에 햇수로 치면 210년이다. 콜럼버스가 항해에서 데리고 떠난 선원과 의사, 목수, 왕실 사절 등 90여 명의 인건비로 계산하면 854일로 단순 수행직무인 산초보다 이들의 급료가 높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금액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스파냐 왕실이 이 중 140만 마라베디를 부담했다. 콜럼버스는 25만 마라베디를 은행 대출로, 나머지는 그의 사업에 관심을 가졌던 재무상이 개인 자격으로 지원했다. 아낌없이 재정을 쏟아부은 명나라와 달리 참 궁색한 재원 조달이었다.대형 선박 등 2000여척 이끌고 항해
유럽에 힘 자랑 목적 출항…원정 성과 '미미'
100년 뒤 3척으로 떠난 콜럼버스
1492년 항해서 카나리아 제도·도미니카 발견
주앙 2세가 소식 먼저 알아…외교 분쟁 시작돼
협상 과정에서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에스파냐 왕실이 제시한 방법은 죄수 중에서 선원을 뽑는 것이었다. 물론 지원자에게는 형의 면제가 약속되었지만, 그거 면제받자고 ‘암흑의 바다’로 알려진 대서양 항해에 목숨을 걸 멍청한 죄수는 없었다. 문제는 일반 선원 중에서도 지원자를 찾기 어려웠다는 것인데, 다행히 항해 실력과 물욕을 고루 갖춘 핀손 형제가 합류하면서 선원 모집은 탄력을 받게 된다. 두 사람은 마치 자기 일처럼 선원들을 모았고, 형제의 실력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1492년 여름은 콜럼버스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설렌 날들이었다. 에스파냐 귀환하던 콜럼버스, 폭풍으로 포르투갈 기착항해 초반은 순조로웠다. 콜럼버스의 자신감과 성공 보수에 대한 선원들의 기대는 불안과 두려움을 압도했다. 출항 후 한 달이 지나고 선단이 카나리아제도를 통과하면서 이들은 슬슬 미지의 바다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 금방 나온다던 육지는 보일 기미가 안 보이고 선원들의 불안이 불만으로 진화하자 콜럼버스는 꼼수를 쓴다. 항해한 거리를 실제보다 적게 기록하는 것인데,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불만이 행동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어느 새벽 누군가 “육지다!”를 외친다. 10월 12일이었고 카나리아제도를 지난 지 또 한 달이 막 지난 때였다. 함대가 발견한 것은 바하마제도의 한 섬이었다. 육지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섬의 이름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로 명명한다. 다시 2주 후인 10월 28일에는 에스파뇰라섬을 발견했는데(서인도제도의 도미니카), 그게 콜럼버스 1차 항해의 마지막 발견이었다. 콜럼버스의 1차 항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주앙 2세였다.
기함을 잃고 두 척으로 귀환하던 콜럼버스가 폭풍으로 인해 리스본 항구에 기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전대미문의 황당하고 엽기적인 외교 분쟁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