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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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대항해 이끈 또 다른 동력 '해도와 세계지도'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길을 연 것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후 6년이 지난 1498년이다. 선단을 이끈 총사령관은 바스쿠 다 가마로 그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온 것은 1492년이다. 주앙 2세는 프랑스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바스쿠 다 가마를 투입했고, 그는 프랑스 선박 억류 조치라는 초강경 대응으로 사태를 해결한다. 그러나 잠시 반짝 빛났을 뿐 다시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497년 인도로 가라는 특명과 함께 재등장해 항해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의 1차 목표는 희망봉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는 기존의 바닷길을 버리고 대서양 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항해에 유리한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인데 말이 쉽지, 당시 안 해 본 일은 다 공포요 모험이다. 123일의 항해 끝에 선단은 희망봉을 돌아 꿈에 그리던 인도양으로 들어선다. 포르투갈의 등장에 예민해진 이슬람 상인들바스쿠 다 가마 선단이 인도 서남단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에 도착한 게 1498년 5월 20일이다. 동아프리카에도 일정 수준으로 발전한 이슬람문명이 있었으나 캘리컷은 그와는 차원이 달랐다. 풍요의 땅 캘리컷 군주 사모린은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을 반겼지만, 일행이 가져온 조악한 유럽 상품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그래도 노림수는 있어 상품을 좋아하는 척하고 환대도 이어진다. 신경이 곤두선 이는 동아프리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무역 루트를 독점하고 있던 캘리컷의 이슬람 상인들이다. 유럽인을 본 이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망할 놈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이들에게 바스쿠 다 가마는 잠재적 경쟁자였고 십자군전쟁의 기억은 증오에 가까웠다. 이슬람 상인들은 포르투갈과 캘리컷의 무역협정 체결을 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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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아메리카 대륙은 중국이 먼저 발견할 뻔했다?
장관이었다. 출항을 보려고 항구에 모여든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선단이 아침 햇살 아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1405년 6월 난징에서 출발한 명나라 선단은 근대 이전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재정을 소모했다는 평에 걸맞은 초호화 거대 함대였다. 기함인 뤼메이마오(綠眉毛)는 길이 150m, 폭 60m에 적재량이 무려 2만 톤이다. 이게 과연 15세기 선박 제조 기술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고(2024년 현재 대한민국 해군이 개발 중인 경항공모함의 길이는 265m, 폭은 약 43m), 여기에 60여 척의 대형 선박 등을 더하면 전체 선박 수는 무려 2000여 척(7차 원정까지의 누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부 기록에는 3500여 척)에 달했다. 승무원 수는 모두 2만7000명이었다고 하는데, 중국인 특유의 허풍을 감안해 모든 수치를 3분의 1로만 잡아도 유럽 전체의 선박 수보다 많았다. 출항의 목적은 더 놀라웠다. 그냥 자랑이었다. 당시 황제인 영락제는 그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규모와 선박 제조 능력과 풍성한 재정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 그 항해를 통해 전 세계에 유통망을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다. 만약 그런 목적으로 원정이 이루어졌다면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없었을 것이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중국인의 성취로 끝났을 것이다. 원정으로 얻은 것은 인도양 주변의 50여 개국에서 명나라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 그마저도 얼마 안 가 해금 정책으로 바닷길을 닫아버렸으니 밥상은 차려놓고 정작 수저는 들지 않았던 셈이다. 부자 함대와 빈자 함대의 대차대조표초라했다. 1492년 8월 세비야 인근 팔로스항을 출발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달랑 세 척이었다. 기함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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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프랑스로 떠난 순간, 이사벨 여왕이 그를 불러들였다
어느 시대나 벤처는 고달프다. 돈을 몇 배로 불려주겠다는데도 투자자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처음 하는 일이라 제안자의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하고 투자자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설명하고 설득하는 동안 혀가 닳고 구두축이 닳는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가 닳아 무의미하게 사라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하면 우리는 달걀을 깨서 세웠다는 에피소드 정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적당한 고생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투자자를 찾아다닌 여정은 좌절과 절망의 파노라마였고, 대서양 항해는 목숨을 건 기만이 가까스로 목적을 달성한 기적이었다.표류지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다1451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스물다섯에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가 탄 배가 해적선의 공격을 받은 것인데, 콜럼버스는 상처를 입은 채 무려 5해리(거의 10㎞)를 헤엄쳐 포르투갈의 라고스 인근 해안에 도착한다. 라고스는 바로 엔히크 왕자가 대서양 탐사를 위해 항구와 조선소를 지은 곳이다. 바다에 관심이 많은 콜럼버스에게 이 표류는 주체할 수 없는 영감을 준다. 그는 제노바로 돌아가는 대신 리스본항에서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웠고, 틈만 나면 배를 타고 주변 항구를 돌았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원양 어선 캐러벨 조종법을 익힌 것도 이 시기로, 1477년에는 아이슬란드를 지나 북극권 한계까지 항해했으니 북쪽으로는 거의 끝까지 간 셈이다.리스본에서 콜럼버스는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아내인 펠리파의 아버지는 엔히크 왕자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한 선장이자 관리였고, 할아버지는 아예 왕자를 직접 섬긴 기사였다. 바닷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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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대항해시대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시절, 지중해 사람들이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곳이 있다. 지중해 서쪽 끝 지브롤터해협에 있는 일명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브롤터해협의 고대 명칭이다. 두 기둥은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유럽의 이베리아반도 사이 좁은 해협의 남과 북에 솟은 바위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쪽 기둥은 이베리아반도 남단의 영국령 지브롤터에 속해 있는 해발 425m의 지브롤터 바위산이다. 그러나 남쪽 기둥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 남겨진 기록이 없다.그리스신화에서 묘사하듯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곧 세상의 끝으로 여겨졌다. 배를 저어 더 나아갔다가는 세상 끝의 어둠과 지옥으로 추락한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고대의 진입금지 경고판인 셈이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에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가 있다고 한 것이 대서양(Atlantic Ocean)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단테도 《신곡: 지옥 편》에서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도록 헤라클레스가 경계선을 표시해둔 좁다란 해협…”이라고 언급했다.이렇듯 고대인의 세계관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안쪽, 즉 지중해에 국한됐다. 이는 지리적 제한일 뿐 아니라 생각의 한계를 규정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누구도 그 너머 미지의 공포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지브롤터해협을 넘어간 사람들이 연 대항해시대모두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 세상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진취적인 해양민족인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은 서부 지중해를 누비면서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대서양에 면한 포르투갈, 모로코 해안까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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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콜럼버스의 교환'은 어떻게 인류를 기아에서 구했나
1492년 10월 12일은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은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해 8월 3일, 서쪽으로 가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러 떠났다가 신대륙, 정확히는 산살바도르섬을 발견한 날이다. 구대륙에 국한됐던 유럽인의 시야가 신대륙 아메리카로 확장된 결정적인 순간이다.그러나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유럽인이 아닌 데다 1506년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을 인도로 알았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7년 두 차례 항해한 끝에 그 땅이 유럽인들이 몰랐던 신대륙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신대륙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남긴 업적 하나는 분명하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유럽인의 세계관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영웅인가, 침략자인가?1492년은 스페인이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800년간 벌인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해이자,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당도한 해다. 이후 스페인은 약 200년간 유럽 최강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금과 은으로 당시 영국·프랑스가 넘볼 수 없는 부를 축적했다.신대륙 발견은 스페인에는 축복이었으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콜럼버스를 비롯해 코르테스, 피사로 등이 잇달아 진출해 원주민을 상대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아즈텍 마야 잉카 문명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스페인 군대는 총과 대포 이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 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발을 딛자 천연두 수두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홍역 백일해 등의 질병이 마치 지옥문이 열리듯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