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벤처사업가' 콜럼버스

8년간 생계 포기하며 투자자 찾아다녀
주앙 2세에 계획 퇴짜 맞고 스페인으로

거리 계산 문제로 제안 또 거절 당하자
실망한 콜럼버스 경쟁국 프랑스로 발길 돌려
스페인 여왕 "성공 넘길 수 없다"며 후원 결정
출생 기록이 뚜렷하지 않아 한동안 이탈리아는 물론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폴란드 등 거의 10여 개 국가가 콜럼버스를 자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콜럼버스가 공식적으로 제노바 사람이 된 것은 1931년 제노바시가 그의 제네바 태생을 입증하는 30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출판한 때부터다.
출생 기록이 뚜렷하지 않아 한동안 이탈리아는 물론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폴란드 등 거의 10여 개 국가가 콜럼버스를 자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콜럼버스가 공식적으로 제노바 사람이 된 것은 1931년 제노바시가 그의 제네바 태생을 입증하는 30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출판한 때부터다.
어느 시대나 벤처는 고달프다. 돈을 몇 배로 불려주겠다는데도 투자자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처음 하는 일이라 제안자의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하고 투자자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설명하고 설득하는 동안 혀가 닳고 구두축이 닳는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가 닳아 무의미하게 사라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하면 우리는 달걀을 깨서 세웠다는 에피소드 정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적당한 고생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투자자를 찾아다닌 여정은 좌절과 절망의 파노라마였고, 대서양 항해는 목숨을 건 기만이 가까스로 목적을 달성한 기적이었다.표류지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다1451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스물다섯에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가 탄 배가 해적선의 공격을 받은 것인데, 콜럼버스는 상처를 입은 채 무려 5해리(거의 10㎞)를 헤엄쳐 포르투갈의 라고스 인근 해안에 도착한다. 라고스는 바로 엔히크 왕자가 대서양 탐사를 위해 항구와 조선소를 지은 곳이다. 바다에 관심이 많은 콜럼버스에게 이 표류는 주체할 수 없는 영감을 준다. 그는 제노바로 돌아가는 대신 리스본항에서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웠고, 틈만 나면 배를 타고 주변 항구를 돌았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원양 어선 캐러벨 조종법을 익힌 것도 이 시기로, 1477년에는 아이슬란드를 지나 북극권 한계까지 항해했으니 북쪽으로는 거의 끝까지 간 셈이다.

리스본에서 콜럼버스는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아내인 펠리파의 아버지는 엔히크 왕자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한 선장이자 관리였고, 할아버지는 아예 왕자를 직접 섬긴 기사였다. 바닷사람의 피가 흐르는 여성이 바다에 환장한 남자를 만났으니 전기가 튄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장인이 사망하자 장모는 남편의 항해 일지와 지도를 사위에게 넘겨준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 기밀에 가까운 A급 문서로 1476년 사고로 우연히 상륙한 포르투갈에서 그는 인생의 모든 기반을 얻은 셈이다. 여기까지는 대략 성공 가도.연달아 거절당한 항해 기획서1484년 콜럼버스는 자기 딴에는 완벽한 항해 계획서를 만들어 주앙 2세를 알현한다. 식민 개척 명가인 처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콜럼버스의 기획안은 항해 검토 위원회로 넘겨졌고 1년여 심사 끝에 반려된다. 그의 계획안에 들어 있는 아시아까지의 항해 거리가 너무 짧다는 게 이유였다.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일본까지 거리를 2400마일(로 계산했지만, 실제 거리는 1만600마일로 콜럼버스 계산의 네 배나 되었다(이 수치는 기록마다 약간씩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몰랐고 그 넓이만큼의 계산이 빠져 있었다. 게다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계획이 거의 마무리 단계이던 주앙 2세의 입장에서 쓸데없이 투트랙으로 사업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낙심한 콜럼버스는 다섯 살 난 아들과 함께 에스파냐로 터전을 옮긴다. 목표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만나는 것이었다. 쉽지 않았다. 왕과 왕비는 중부와 남부 지방을 옮겨 다니고 있었는데 여름 궁과 겨울 궁처럼 계절에 맞춘 호사가 아니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세비야에 거처를 정하고 왕실이 근처로 오기를 기다린다. 무려 9개월의 잠복 끝에 그는 코르도바로 옮겨 온 이사벨 여왕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만남은 순탄했다. 나이와 성격이 비슷했고, 심지어 외모까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사벨 여왕은 특히 그의 기획 의도에 호감을 느꼈다. 콜럼버스는 그의 목적이 단순한 식민지 개척을 넘어 가톨릭의 전파에 있다고 역설했는데, 그것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여왕의 마음에 징을 울리는 발언이었다. 게다가 그가 요청한 배는 달랑 세 척.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안을 왕립 학술 위원회에 넘겼지만, 결론은 반려였다. 여왕의 호의도 거기까지였다.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 그라나다와 전쟁 중이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에 몰입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벤처 인생’에 서광 비추던 순간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1492년 1월, 이사벨은 마침내 그라나다 왕국의 항복을 받아낸다. 콜럼버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계획을 설명할 기회가 온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안을 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상정했고, 위원회는 검토 끝에 ‘공식적’으로 그의 계획안에 또 퇴짜를 놓는다. 역시 거리가 문제였다. 자신의 거리 계산을 확신하고 있던 콜럼버스는 위원회의 무지를 한탄하며 인생의 마지막 도박을 결심한다. 계획안을 들고 프랑스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 계산은 있었다. 프랑스는 지중해를 놓고 아라곤 왕국과 경쟁 관계에 있었고 그가 프랑스행을 택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상황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매우 불확실한 예측이었지만 콜럼버스의 도박은 성공한다. 그가 프랑스로 떠난 직후 이사벨 여왕은 생각을 고쳐먹고 콜럼버스에게 사람을 보낸다. 겨우 세 척 배를 내주지 않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콜럼버스의 성공을 프랑스에 넘길 수는 없었다. 8년간 생계를 포기하고 매달린 벤처 사업가 콜럼버스 인생에 서광이 비치고 에스파냐에는 세계를 제패하는 초강국으로 들어서는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