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벤처사업가' 콜럼버스
8년간 생계 포기하며 투자자 찾아다녀
주앙 2세에 계획 퇴짜 맞고 스페인으로
거리 계산 문제로 제안 또 거절 당하자
실망한 콜럼버스 경쟁국 프랑스로 발길 돌려
스페인 여왕 "성공 넘길 수 없다"며 후원 결정
8년간 생계 포기하며 투자자 찾아다녀
주앙 2세에 계획 퇴짜 맞고 스페인으로
거리 계산 문제로 제안 또 거절 당하자
실망한 콜럼버스 경쟁국 프랑스로 발길 돌려
스페인 여왕 "성공 넘길 수 없다"며 후원 결정

리스본에서 콜럼버스는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아내인 펠리파의 아버지는 엔히크 왕자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한 선장이자 관리였고, 할아버지는 아예 왕자를 직접 섬긴 기사였다. 바닷사람의 피가 흐르는 여성이 바다에 환장한 남자를 만났으니 전기가 튄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장인이 사망하자 장모는 남편의 항해 일지와 지도를 사위에게 넘겨준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 기밀에 가까운 A급 문서로 1476년 사고로 우연히 상륙한 포르투갈에서 그는 인생의 모든 기반을 얻은 셈이다. 여기까지는 대략 성공 가도.연달아 거절당한 항해 기획서1484년 콜럼버스는 자기 딴에는 완벽한 항해 계획서를 만들어 주앙 2세를 알현한다. 식민 개척 명가인 처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콜럼버스의 기획안은 항해 검토 위원회로 넘겨졌고 1년여 심사 끝에 반려된다. 그의 계획안에 들어 있는 아시아까지의 항해 거리가 너무 짧다는 게 이유였다.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일본까지 거리를 2400마일(로 계산했지만, 실제 거리는 1만600마일로 콜럼버스 계산의 네 배나 되었다(이 수치는 기록마다 약간씩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몰랐고 그 넓이만큼의 계산이 빠져 있었다. 게다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계획이 거의 마무리 단계이던 주앙 2세의 입장에서 쓸데없이 투트랙으로 사업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낙심한 콜럼버스는 다섯 살 난 아들과 함께 에스파냐로 터전을 옮긴다. 목표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만나는 것이었다. 쉽지 않았다. 왕과 왕비는 중부와 남부 지방을 옮겨 다니고 있었는데 여름 궁과 겨울 궁처럼 계절에 맞춘 호사가 아니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세비야에 거처를 정하고 왕실이 근처로 오기를 기다린다. 무려 9개월의 잠복 끝에 그는 코르도바로 옮겨 온 이사벨 여왕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만남은 순탄했다. 나이와 성격이 비슷했고, 심지어 외모까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사벨 여왕은 특히 그의 기획 의도에 호감을 느꼈다. 콜럼버스는 그의 목적이 단순한 식민지 개척을 넘어 가톨릭의 전파에 있다고 역설했는데, 그것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여왕의 마음에 징을 울리는 발언이었다. 게다가 그가 요청한 배는 달랑 세 척.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안을 왕립 학술 위원회에 넘겼지만, 결론은 반려였다. 여왕의 호의도 거기까지였다.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 그라나다와 전쟁 중이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에 몰입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벤처 인생’에 서광 비추던 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