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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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유럽·인도 진출 상인들, 우편 통해 각국 정보 수집
총이나 대포처럼 직접적 살상력을 지닌 것만 무기로 본다면 현대전을 절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신체에 바로 위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암호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3대 전선 중 하나인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상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일이다. 일본은 당황했다. 감청기를 통해 새들이 지저귀는 듯 희괴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문자로 옮길 수 없는 언어, 그것은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인디언 나바호족의 언어였다. 나바호족의 언어는 문자 없이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구전언어로 어법, 성조, 음절이 복잡하고 심지어 하나의 동사로 주어, 서술어, 부사를 포함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 난해한 언어를 한 번 더 꼬아 부엉이는 정찰기, 제비는 어뢰정, 상어는 구축함 등으로 짝을 맞춰놓았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계 언어에 가까운 이 암호가 가장 빛을 발한 게 이오시마 전투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나바호 병사들은 한숨도 자지 않고 1000개 가까운 정보와 명령을 전달했다. 통신을 담당했던 한 미군 정보 장교는 나바호 암호가 없었다면 섬을 함락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회고했다. 정보력 만으론 부족고대인이라고 암호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을 터. 다만 방식이 조악해 풀기가 쉬웠을 뿐이다. 카이사르는 가족이나 측근과 비밀통신을 할 때 알파벳을 세 자씩 뒤로 물려 읽는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했다. 가령 A는 D, B는 E 같은 식이다. 그가 가족에게 받은 마지막 메시지는 “암살자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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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아메리카 대륙은 중국이 먼저 발견할 뻔했다?
장관이었다. 출항을 보려고 항구에 모여든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선단이 아침 햇살 아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1405년 6월 난징에서 출발한 명나라 선단은 근대 이전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재정을 소모했다는 평에 걸맞은 초호화 거대 함대였다. 기함인 뤼메이마오(綠眉毛)는 길이 150m, 폭 60m에 적재량이 무려 2만 톤이다. 이게 과연 15세기 선박 제조 기술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고(2024년 현재 대한민국 해군이 개발 중인 경항공모함의 길이는 265m, 폭은 약 43m), 여기에 60여 척의 대형 선박 등을 더하면 전체 선박 수는 무려 2000여 척(7차 원정까지의 누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부 기록에는 3500여 척)에 달했다. 승무원 수는 모두 2만7000명이었다고 하는데, 중국인 특유의 허풍을 감안해 모든 수치를 3분의 1로만 잡아도 유럽 전체의 선박 수보다 많았다. 출항의 목적은 더 놀라웠다. 그냥 자랑이었다. 당시 황제인 영락제는 그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규모와 선박 제조 능력과 풍성한 재정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 그 항해를 통해 전 세계에 유통망을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다. 만약 그런 목적으로 원정이 이루어졌다면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없었을 것이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중국인의 성취로 끝났을 것이다. 원정으로 얻은 것은 인도양 주변의 50여 개국에서 명나라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 그마저도 얼마 안 가 해금 정책으로 바닷길을 닫아버렸으니 밥상은 차려놓고 정작 수저는 들지 않았던 셈이다. 부자 함대와 빈자 함대의 대차대조표초라했다. 1492년 8월 세비야 인근 팔로스항을 출발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달랑 세 척이었다. 기함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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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떠난 순간, 이사벨 여왕이 그를 불러들였다
어느 시대나 벤처는 고달프다. 돈을 몇 배로 불려주겠다는데도 투자자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처음 하는 일이라 제안자의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하고 투자자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설명하고 설득하는 동안 혀가 닳고 구두축이 닳는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가 닳아 무의미하게 사라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하면 우리는 달걀을 깨서 세웠다는 에피소드 정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적당한 고생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투자자를 찾아다닌 여정은 좌절과 절망의 파노라마였고, 대서양 항해는 목숨을 건 기만이 가까스로 목적을 달성한 기적이었다.표류지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다1451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스물다섯에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가 탄 배가 해적선의 공격을 받은 것인데, 콜럼버스는 상처를 입은 채 무려 5해리(거의 10㎞)를 헤엄쳐 포르투갈의 라고스 인근 해안에 도착한다. 라고스는 바로 엔히크 왕자가 대서양 탐사를 위해 항구와 조선소를 지은 곳이다. 바다에 관심이 많은 콜럼버스에게 이 표류는 주체할 수 없는 영감을 준다. 그는 제노바로 돌아가는 대신 리스본항에서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웠고, 틈만 나면 배를 타고 주변 항구를 돌았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원양 어선 캐러벨 조종법을 익힌 것도 이 시기로, 1477년에는 아이슬란드를 지나 북극권 한계까지 항해했으니 북쪽으로는 거의 끝까지 간 셈이다.리스본에서 콜럼버스는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아내인 펠리파의 아버지는 엔히크 왕자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한 선장이자 관리였고, 할아버지는 아예 왕자를 직접 섬긴 기사였다. 바닷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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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이 동쪽 막자 서쪽으로 눈길 돌린 콜럼버스
전 세계에서 유대인에 호의적인 나라는 한국과 미국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도 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미국인의 절반이 등을 돌렸지만(대체로 젊은 세대와 민주당 지지자) 우리는 아직도 유대인의 든든한 심정적 후원자다.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집회에서 뜬금없이 이스라엘 국기가 휘날리는가 하면 서점에서는 <죽기 전에 한 번은 유대인을 만나라> <부모라면 유대인처럼> 같은 책들이 인기리에 팔린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서 다른 하나는 그와 내가 닮아서. 실제로 한국인과 유대인은 닮은 구석이 많다. 똘똘 뭉치는 강렬한 민족의식, 열정적인 자녀 교육열, 넘치는 근면성(특히 이민 사회에서 보이는) 그리고 풍부한 영적 성향 등이 그렇다. 반면 유대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호를 별로 따라가지 못한다. 유대인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탈무드다. 집집마다 탈무드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한 권 정도는 있으며, 교육이나 글쓰기에서 많이 활용된다. A 인터넷 서점에서 탈무드를 검색하면 무려 1141건이 뜬다. 그런데 탈무드는 과연 한 권으로 이루어진 책일까. “집에 안 보는 탈무드 있으면 좀…”유대인의 율법은 성문(成文)과 구전(口傳) 둘이다. 구약성경의 모세 5경이 성문 율법으로 대략 300페이지짜리 단행본 한 권 분량이다. 보통 ‘토라’라고 한다. 유대인은 모세가 말로 전한 가르침을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신앙의 바탕으로 삼았는데 그게 ‘미쉬나’와 ‘게마라’다. 이 둘을 합친 게 탈무드로 분량이 300페이지짜리 단행본 40권 분량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거나 가지고 있는 탈무드는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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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야곱이 천사와 싸워 얻은 이름
유대인은 참 대단한 민족이다.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민족이 무려 1800년이 지나 자기들이 살았던 곳에 다시 국가를 세웠다. 여기서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1910년의 우리와 같은 국권 침탈 아니라 아예 영토를 잃은 실지(失地)를 말한다. 국가의 3대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거할 곳’을 상실한 것이다. 서기 132년 유대인의 마지막 반란이 일어난다. 지도자는 시몬 바르 코크바라고 불리는 사나이로 유대인에게 공식적으로 메시아 인증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상대는 로마제국. 3년여간 이를 악물고 싸웠지만 전투 기계나 다름없는 로마 군단을 상대로 민간인들이 거둘 수 있는 성과는 애초부터 없었다. 로마 군대는 1000개 이상의 마을을 석기시대로 돌려놓았으며 60만 명을 학살했다. 그렇게 짓밟아놓고도 로마는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더 이상 자비는 없다는 것을 공언했고, 진압 작전을 말살 작전으로 전환해 아예 끝을 봤다.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파톨리아라고 개명했으며, 민족의 이름은 유대인이 아닌 ‘시리아 -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다. 유대인이 그토록 싫어하는 팔레스타인을 이름표로 붙여준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로마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했다. 다 나가고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다. 로마가 상대방 혹은 피지배 민족에게 이토록 가혹했던 것은 카르타고와 벌인 페니키아 전쟁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카르타고를 박살내면서 로마는 그 땅에서 식물의 생장이 불가능하도록 밭에 소금까지 뿌렸다.유대인의 역사는 중동 역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외국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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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대륙봉쇄, 자신을 겨눈 총구 됐다
예술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을 주저앉히는 방법은 간단하다. “호모사피엔스 역사 이래 최고의 재능” 같은 찬사를 안겨주면 스스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대부분 다음 작품에서 망한다. 최악의 경우 데뷔작이 대표작이자 은퇴작이 되기도 하는데, 대중음악에서는 이런 경우를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라고 부른다. 악취미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중견 이상부터는 쉽지 않다. 칭찬도 제법 받아본 터라 매체에서 하는 소리도 가려들을 줄 알고 어느 정도 깜냥도 계산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확실하게 통하는 필살기가 있으니 ‘거장’ 타이틀을 달아주는 거다. 증세는 심각하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뭐든 거장답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끝에 닭 잡을 때 소 칼을 쓰고, 가벼운 패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강슛을 날린다.얼마 전 개봉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나폴레옹>을 보며 든 생각이다. <나폴레옹>은 러닝타임이 무려 158분인 방광 압박 영화다. 시작하고 한 시간 동안 끔찍했다. 프랑스대혁명을 다루고 있는데, 아는 사람에게는 아는 얘기라 지루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몰라서 수면제다. 집에 갈까 생각할 무렵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나왔다. 프랑스 대 오스트리아·러시아 황제가 한판 붙어 ‘삼제회전(三帝會戰)’이라 불리는데, 한겨울 날아든 포탄이 호수의 얼음을 깨면서 말과 사람이 무더기로 빠져 들어가는 장면은 압권이다. 속으로 소리쳤다. “이거라고요, 감독님.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관객들이 기대한 것은 인간 나폴레옹에 대한 ‘거장다운 성찰’이 아니다. ‘전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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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만 '대약진'한 中 경제개발…굶주림은 일상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중국군을 농민군이라고 불렀다. 사람 깔보는 게 취미였던 맥아더의 고질병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중국 혁명의 본질이 농민 반란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맥아더에게 중국과의 전쟁은 농민들과의 싸움이었고 어찌 보면 정확한 표현이었던 것이다.1921년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 첩자에게 200위안을 받아 썼을 때부터 마오쩌둥은 크렘린에 쥐여살았다. 제자를 가르치려는 혁명 스승의 주문은 집요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에 따라 스탈린은 줄기차게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주문했고, 이는 마오에게 스트레스의 원천이었다.게다가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의 군사 고문관 오토 브라운은 스탈린의 말이라면 똥을 된장이라고 해도 믿는 인간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마오를 노이로제 상태에 빠뜨린다. 전술 회의에서 기어이 마오는 폭발한다. “눈을 까뒤집고 봐라. 중국에 무슨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다는 말인가.” 이어 마오의 정치적 싸움 개 덩샤오핑은 가장 젊고 혁명적인 병사를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불려온 청년 병사는 낫을 들고 있었고 거기에 쇠꼬챙이를 연결한 자신의 참신함을 자랑했다.덩샤오핑은 브라운에게 물었다. “댁의 눈에는 저게 프롤레타리아트로 보이냐.” 이 에피소드는 실화가 아니라 마오파와 반대파 사이에 오간 논쟁을 짜깁기해 재구성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마오가 농민을 무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그 자신 역시 농민이었던 마오는 그들을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중국 혁명의 동력이 농민인 동시에 자신이 건설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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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왕국 악단이 더 뛰어나냐"…경쟁이 모차르트 낳아
생전에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지난해 8월 미국 시카고 초대형 록 페스티벌 ‘롤라팔루자’에서 7만 관중을 쥐락펴락하며 압도적인 무대를 보여준 걸그룹 ‘뉴진스’ 이야기다. 세 번 놀랐다. 중간중간 관중과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대 매너가 당당해서, 그리고 도무지 우리나라 여자아이들 같지 않아서(한 명은 호주, 베트남 이중 국적이지만 뭐). 일찍이 선각 이수만 선생께서 고등학생 시절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공연을 보며 “외국 가수에게 한국 팬들이 열광하는 것이 가하다면 그 역 또한 불가할 것이 없지 않은가” 각오를 다지신 지 반세기, 그리고 그걸 실현하겠다고 클론과 H.O.T의 손을 잡고 그것도 외국이라고 중국 음악 시장으로 출격하신 지 불과 20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한국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를 안방 드나들 듯하는 모습이 당연해 보이는 10대들에겐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겠지만, 나 같은 ‘아재’ 입장에서는 뉴진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경천동지할 일이다.예술에 필요한 게 재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상에 재능만큼 흔한 게 없다. 그리고 더 흔한 게 실패한 재능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 예술을 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운은 사람과 때다. 마이클 잭슨이 200년 전 미국 남부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라. 그저 재롱 잘 떠는 ‘검둥이’ 취급받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 운도, 활동 시기도 죄다 나빴던 게 모차르트다.신을 찬미하는 게 음악 예술가들의 유일한 활동 영역이던 중세가 저물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세속 음악이 종교음악과 헤어지는데, 이어지는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