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르네상스 시대 '정보 메카' 베네치아

본국 보낼 중요한 서신은 암호로 처리
가장 경제적 효용가치 큰 건 지리 정보
독보적 지도 제작 능력 있었지만 관리 허술

지도 덕에 인도 바닷길 뚫은 포르투갈
베네치아 향신료 무역에 큰 타격 줘
1600년 이후 영국·네덜란드가 향신료 장악
태평양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한 나바호족 이야기를 다룬 2002년 영화. 주인공 조 엔더스는 나바호족을 보호하는 동시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는 임무를 받는다
태평양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한 나바호족 이야기를 다룬 2002년 영화. 주인공 조 엔더스는 나바호족을 보호하는 동시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들을 죽이라는 임무를 받는다
총이나 대포처럼 직접적 살상력을 지닌 것만 무기로 본다면 현대전을 절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신체에 바로 위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암호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3대 전선 중 하나인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상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일이다. 일본은 당황했다. 감청기를 통해 새들이 지저귀는 듯 희괴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문자로 옮길 수 없는 언어, 그것은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인디언 나바호족의 언어였다. 나바호족의 언어는 문자 없이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구전언어로 어법, 성조, 음절이 복잡하고 심지어 하나의 동사로 주어, 서술어, 부사를 포함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 난해한 언어를 한 번 더 꼬아 부엉이는 정찰기, 제비는 어뢰정, 상어는 구축함 등으로 짝을 맞춰놓았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계 언어에 가까운 이 암호가 가장 빛을 발한 게 이오시마 전투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나바호 병사들은 한숨도 자지 않고 1000개 가까운 정보와 명령을 전달했다. 통신을 담당했던 한 미군 정보 장교는 나바호 암호가 없었다면 섬을 함락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회고했다. 정보력 만으론 부족고대인이라고 암호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을 터. 다만 방식이 조악해 풀기가 쉬웠을 뿐이다. 카이사르는 가족이나 측근과 비밀통신을 할 때 알파벳을 세 자씩 뒤로 물려 읽는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했다. 가령 A는 D, B는 E 같은 식이다. 그가 가족에게 받은 마지막 메시지는 “암살자를 조심하라”였다. 전설적 스파이 마타 하리는 악보를 암호로 사용했다. 각각의 음표에 알파벳에 대응한 형태로, 얼핏 평범한 악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연주해보면 죄다 불협화음이다. 마타 하리의 첩보활동으로 20여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슬픈 사례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암호국은 동맹국과 협상국을 통틀어 가장 탁월한 정보 조직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이탈리아, 세르비아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지만, 전력상 열세로 정보 자산을 군사적 이익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외교관…사실은 첩자이자 염탐꾼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많은 암호를 사용한 국가가 베네치아다.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해외 상주 대사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결국 정보 수집이었다. 대사들은 정기적으로 본국에 서신을 보내 동향을 보고했고, 중요한 부분은 암호로 처리했다. 오스만제국은 ‘약제(藥劑)’, 오스만 군대는 ‘카라반’, 대포는 ‘거울’ 같은 식이다. 오스만제국에 파견된 대사들은 종종 첩자 혐의로 추방되기도 했다. 베네치아 정부는 이미 14세기부터 우편 제도를 만들 정도로 정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서유럽은 물론 인도, 실론, 미얀마까지 진출한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 우편을 통해 각종 정보를 본국에 전달했다. 이 중 경제적 효용 가치가 가장 큰 게 지리 정보다. 15세기 베네치아는 독보적 지도 제작 중심지였는데, 문제는 중요성을 인지만 했을 뿐 관리가 허술했다는 것이다. 1436년 안드레아 비안코라는 상인은 포르투갈 왕실의 주문으로 해도(海圖)를 만들었다. 1450년 마우로라는 수도사 역시 포르투갈 왕실의 의뢰로 유럽 최고의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1498년 5월 포르투갈은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여는 데 성공한다. 유럽에서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곳은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 귀족 지롤라모 프리울리는 1499년 8월 자신의 일기에 포르투갈 왕실의 선단이 인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기록했다. 바스쿠 다가마가 아직 포르투갈로 귀환하기도 전이었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베네치아의 쇠락베네치아 향신료 무역의 장애물은 오스만제국이다. 경제적 이익을 놓고 1422년부터 1718년까지 큰 전쟁만 여덟 번을 치렀다(베네치아 3승 5패). 그러나 전쟁 자체가 목적이 아닌 까닭에 오스만과의 분쟁은 단기적 타격으로 끝났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인도 선단은 베네치아 향신료 무역을 장기 침체에 빠뜨렸다. 지롤라모 프리울리는 이제껏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구입해온 독일, 프랑스 상인들이 거래처를 포르투갈로 바꿀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측을 일기에 적었다. 1501년 포르투갈 왕은 베네치아 정부에 이제부터는 리스본에 와서 향신료를 구입해 가라는 말로 예측을 현실로 만들었다. 원조 종갓집의 굴욕. 베네치아라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의 맘루크 제국에게 포르투갈 선단이 인도양을 멋대로 나다니지 못하도록 사주했지만 육전(陸戰) 중심의 맘루크는 인도양에서 충분한 해상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베네치아와 포르투갈이 내내 적대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신흥 세력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부상을 막기 위해 협력 내지 공조 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한 기록도 있다. 16세기 말부터 인도양에 진출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1600년 이후 인도에서 직접 싣고 온 향신료를 북유럽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와 포르투갈 사이에서 시작된 향신료 무역 전쟁의 최종 승자는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라이벌 포르투갈은 가까스로 따돌렸지만 흥하면 쇠하기 마련인 역사의 법칙에서 베네치아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