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인도 무역로 개척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6년 뒤
포르투갈, 1498년에 인도 가는 길 열어

동방과 무역 재미 보던 베네치아 '당황'
팔아넘긴 해도가 성공에 일조

이슬람 상인도 인도와 거래 못 하게 '훼방'
포르투갈, 보복 빌미 무력으로 무역로 뚫어
바스쿠 다 가마의 항로. 아프리카 서남쪽으로 꽤 멀리 돌아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의 캘리컷, 코친, 고아는 대항해시대에 여러 번 등장하는 지명이므로 기억해두면 관련 글을 읽을 때 편하다.
바스쿠 다 가마의 항로. 아프리카 서남쪽으로 꽤 멀리 돌아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의 캘리컷, 코친, 고아는 대항해시대에 여러 번 등장하는 지명이므로 기억해두면 관련 글을 읽을 때 편하다.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길을 연 것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후 6년이 지난 1498년이다. 선단을 이끈 총사령관은 바스쿠 다 가마로 그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온 것은 1492년이다. 주앙 2세는 프랑스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바스쿠 다 가마를 투입했고, 그는 프랑스 선박 억류 조치라는 초강경 대응으로 사태를 해결한다. 그러나 잠시 반짝 빛났을 뿐 다시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497년 인도로 가라는 특명과 함께 재등장해 항해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의 1차 목표는 희망봉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는 기존의 바닷길을 버리고 대서양 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항해에 유리한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인데 말이 쉽지, 당시 안 해 본 일은 다 공포요 모험이다. 123일의 항해 끝에 선단은 희망봉을 돌아 꿈에 그리던 인도양으로 들어선다. 포르투갈의 등장에 예민해진 이슬람 상인들바스쿠 다 가마 선단이 인도 서남단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에 도착한 게 1498년 5월 20일이다. 동아프리카에도 일정 수준으로 발전한 이슬람문명이 있었으나 캘리컷은 그와는 차원이 달랐다. 풍요의 땅 캘리컷 군주 사모린은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을 반겼지만, 일행이 가져온 조악한 유럽 상품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그래도 노림수는 있어 상품을 좋아하는 척하고 환대도 이어진다. 신경이 곤두선 이는 동아프리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무역 루트를 독점하고 있던 캘리컷의 이슬람 상인들이다. 유럽인을 본 이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망할 놈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이들에게 바스쿠 다 가마는 잠재적 경쟁자였고 십자군전쟁의 기억은 증오에 가까웠다. 이슬람 상인들은 포르투갈과 캘리컷의 무역협정 체결을 막았고,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 항로 개척에 만족하고 귀환해야 했다. 그가 모르던 게 있으니 변화한 바람의 방향이었다. 8월 말이 되자 풍향이 아프리카에서 인도 쪽으로 바뀌었고 이들은 계절풍을 맞받아가며 거슬러 가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귀환 시기가 늦어졌고 괴혈병 등으로 선원 3분의 2가 사망한다. 네 척으로 출발한 바스쿠 다 가마의 선단은 두 척으로 줄었지만 그들이 싣고 온 향신료만으로도 원정 비용의 60배가 넘는 이익을 얻었으니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입이 귀에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누엘 1세, 상품 부실을 무력으로 해결마누엘 1세는 곧바로 2차 항해를 지시한다. 13척 함대가 꾸려졌고 수백 명의 전투 병력과 대포 등 다량의 무기가 탑재된다. 2차 함대의 지휘자는 페드루 카브랄로, 그가 기록상 브라질을 발견한 사람이다. 카브랄의 함대가 브라질에 머문 것은 열흘 정도였는데, 육지 탐사를 대충 한 것은 중요한 미션이 이들에게 내려졌기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를 떠날 때 사모린은 포르투갈 국왕에게 보내는 서신을 손에 쥐여준다. 자신들은 계피, 생강, 후추를 충분히 생산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황금, 은, 진주와 바꾸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마누엘 1세의 표정은 어두웠다. 포르투갈에는 황금, 은, 진주는커녕 이렇다 할 무역 가치가 있는 상품도 없었다. 결국 인도양 무역에 포르투갈이 끼어들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고 카브랄 함대의 미션은 폭력을 사용한 무역협정 체결이었다.

사모린에게 교역소 건설을 허락받았지만, 이슬람 세력의 기습 공격으로 카브랄의 선단은 캘리컷에서 철수하는 수모를 맛보지만, 이들은 계획대로 바로 보복에 들어갔고 캘리컷을 무차별 포격한 다음 이슬람 상인들의 배를 나포하고 사로잡은 선원들을 처형한다. 아무리 사모린이 우호적이라 해도 자국 내에서 외국인이 멋대로 전투 행위를 벌인 것은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그는 환대를 끊었고, 포르투갈과 캘리컷의 관계는 최악이 된다. 전투와 폭풍으로 카브랄이 잃은 배는 모두 9척이며, 살아남은 4척의 포르투갈 함대가 귀향한 것은 1501년 6월이다. 배에 싣고 온 향신료는 역시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는 이익을 남겼고, 마누엘 1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1502년 3차와 4차 항해가 이어진다. 4차 항해의 지휘자는 다시 바스쿠 다 가마로 교체됐는데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무역은 본격적으로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전투와 학살이 이어졌고, 이는 나중에 그의 명성에서 얼룩으로 남는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초기 해외 팽창에서 유난히 유혈사태가 잦은 것은 사령관 대부분이 말보다 칼이 익숙한 기사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급성장한 부르주아계급에 밀려 몰락한 이 귀족 출신 기사 계급이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해외 모험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경악한 베네치아 귀족들바스쿠 다 가마의 선단이 캘리컷 항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유럽에서 처음 접한 것은 무역 왕국 베네치아였다.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열었다는 것은 동방과의 향신료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던 자신들의 호시절이 끝났다는 의미다. 그들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이 오보이기를 기도했지만, 거기에 일조한 것이 바로 자신들이었기에 더욱 속이 상했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마누엘 1세의 인도로 가는 길 프로젝트에 확신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베네치아에서 제작한 해도(海圖)와 세계지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도를 신나게 포르투갈에 팔아먹은 이도 자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