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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두 번의 '양요' 거치며 쇄국정책 옳았다고 착각…4년 후 일본 공격 대비하는 교훈조차 못 얻어
미국은 1847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포경선들을 북태평양 어장으로 진출시켜 러시아와 부딪쳤다. 1853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강행해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청나라, 필리핀 등과 캄차카 반도, 쿠릴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은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서해안의 모든 관청에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와 신도를 죽였다.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이를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두 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동 입구인 염창에 정박하고, 다음날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하자 도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곧 산둥으로 회항한 함대는 준비를 마친 뒤 10월 14일 군함 네 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어 벌어진 문수산성 전투에서 포수와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 지역주민과 합동작전을 벌인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를 약탈했다.그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 이 사건을 빌미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한 군함 다섯 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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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세도정치 철폐 등 기득권 일소 성공…쇄국으로 세계질서와 열강 움직임 못 읽어
조선은 백성에게 가난과 질병, 부패와 공권력의 폭력을 안긴 불행한 체제였다.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지속됐다. 소수 가문이 왕권을 능가하는 정치권력과 경제, 문화 등을 장악했고, 관직 매매 등 부패를 일상화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일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정착했다. 1863년 이런 상황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역사에 등장했다.그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중앙과 지방에 포진한 세도정치의 주역과 동조 세력을 숙청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정치권과 군사권을 분리했다.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자 재산권 및 권력투쟁과 직결된 수많은 서원을 47개만 남겨두고 철폐했다. 양반들의 특권으로 병역 대신 부과했던 군포를 다시 거둬들였고, 사창제도 등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런 개혁정책들은 구권력의 인적, 기득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고, 자신을 중심으로 신권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백성도 환호했다.하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추진한 경복궁 재건은 개혁을 좌초시켰다. 백성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재정 부족 때문에 발행한 당백전은 초기 단계에서 화폐경제의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세금을 걷는 데 차질이 생겼고, 백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원납전을 부과해 관청과 지주들의 자진 기부를 유도했지만 결국 백성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100년 가까이 성장한 실학자들의 존재와 연구, 정책 대안을 소홀히 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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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서양문물 적극 흡수하며 위기극복 할 때 조선은 권력투쟁 등으로 급변하는 정세 못읽어
조선 통신사들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됐는데, 한 번에 300~500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일본의 변신과 발전을 보면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오랑캐라는 편견과 패전국이었다는 반감 때문인지 성리학의 우월감과 개인의 문학적 능력을 자랑하는 데 공력을 기울였다. 물론 조엄 등 일부는 꼼꼼히 상황을 기록하고, 귀국 후에는 문물을 도입할 것을 역설했지만 ‘북학’을 표방한 연행사 등과 달리 ‘남학’을 자처하지 못한 채 조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19세기 중반 무렵 서양 세력은 동아시아 세계를 유럽의 무역망,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서양의 우세한 무력, 불평등한 조약, 질 높은 상품 등과 대응해 방어와 역전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1853년 미국 군함(흑선)이 에도에 가까운 우라가에 정박해 포함외교를 개시했고, 1854년에는 요코하마에서 ‘일·미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이어 1855년에는 러시아와 ‘일·러 화친조약’을 맺었다. 사할린에 이미 진출한 러시아와는 1791년부터 지정학적으로 숙명적인 관계였다. 바쿠후는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해 1799년에 쿠릴열도를 ‘직할령’으로 지정했고, 1808년에는 마미야 린조를 사할린 지역에 파견했다. 그는 아무르강 하구까지 탐사해 오호츠크해와 북태평양 일부까지 포함된 지도를 만들었다. 김정호는 1861년에 이르러 ‘대동여지도’를 그렸다. 바쿠후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1854년 네덜란드에 군함과 장비를 발주했고, 1855년 10월에는 교관단이 입국해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르쳤으며, 1857년 9월 발주했던 군함이 드디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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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보다 13년 먼저 외세 맞닥뜨린 일본…항구 개방하고 선진 서양문물 적극 수용
1866년 프랑스 함대 3척이 영종도와 강화도를 거쳐 서울의 양화대교까지 정찰하고 청나라로 귀환했다. 다시 7척의 전함을 끌고 와 600명의 해병대를 상륙시켜 강화도를 파괴하고 약탈했다. 1871년에는 미국이 아시아 함대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대로 강화도를 공격해 군인과 백성 300여 명을 죽였다.이에 앞서 일본은 1853년 미국이 파견한 흑선(군함)의 포함외교에 경악했고, 1854년에는 오키나와와 유·미(琉·美) 수호조약을 맺고 온 미국과 ‘일·미 통상조약’을 맺어 개항을 선택했다.의아하다. 불과 13년 앞서 선진 외세를 경험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켰고, 1910년에는 식민지로 만들어 아직도 분단의 비극이라는 멍에를 못 풀고 있다.일본은 무슨 일을 어떻게 벌여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일까. 일본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과 분명히 달랐다.첫째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종류와 성격이다. 전통신앙을 계승했고, 18세기 후반에는 국학을 발전시켜 신도사상과 천황제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효와 인, 근왕정신(충)을 중요시한 조선의 성리학과 달리 천황과 주군에 충성하고, 의리와 명예를 준거가치로 삼았다. 불교는 ‘선(禪)’을 매개로 무사도와 결합했고, 백성의 실생활과 밀접해져 주도적인 사회사상 역할을 했다. 비록 16세기 후반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부 지역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도 경시할 수 없다.둘째,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현재 오이타현 지역에서는 1582년 4명의 소년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고, 1613년 센다이번이 파견한 유럽 사절단은 범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와 쿠바를 거친 뒤 대서양을 지나 에스파냐에 도착했다. 그들은 로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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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세력의 저항과 사회체제 경직성 벽 막혀…북학파 이상과 정책제안, 부분적 개선에 그쳐
만약 청나라, 일본, 러시아를 통해 서양의 평등사상과 독립 의지, 발전된 과학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필시 세계의 존재와 문화의 다양성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관념론을 벗어나 실용론을 추구했을 것이다. 또 지구와 우주의 인식을 통해 거시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조선의 정체성도 더 자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익 박지원 안정복 유득공 등은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발견하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재인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과 정책제안은 부분적 개선은 가져왔지만, 그 또한 왕을 비롯한 주류의 이익이 반영된 결과가 컸다.북학파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첫째, 주류 집단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세계관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역동성을 상실해 400년 가까이 진보와 혁신의 필요성에 눈감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신사상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했다.둘째, 신분제 사회체제의 경직성이다. 신분에 따른 착취와 예속의 구조가 심각해 자발적인 생산과 창조가 어려웠다. 산업과 상업 등이 미발달했고, 자발성을 망각한 백성은 의욕을 잃은 생산자들이었다. 이익이 정리했듯 지주와 농민, 양반과 상인, 출사자와 비출사자, 적자와 서얼 사이에 관직과 토지를 놓고 숙명적인 이익 충돌이 벌어지는 구조였다.셋째, 추진 집단의 한계와 능력 부족이다. 소외 집단이면서 서얼인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력과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심지어는 정약용도 고위관리나 대토지 소유자가 아니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를 유도할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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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하던 조선에 등장한 사상운동, 북학 주류집단 반발과 사회체제 경직성에 부딪혀
17세기 후반부터 두꺼운 벽틈으로 미풍이 불어오고, 메마른 땅에서는 샘물이 솟기 시작해 점차 강물로 변해갔다. 북학을 핵으로 삼은 실학이 조선 역사에 등장했다.북학은 소외됐던 이상주의자들이 주도해 적대감을 가졌던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해 부강한 조선, 잘사는 백성을 목표로 삼자는 사회개혁의 학풍이고 사상운동이었다.첫째, 그들이 추구한 목적과 제안한 정책은 ‘경세치용’ ‘이용후생’을 거쳐 ‘실사구시’로 단계적인 발전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인식론의 변화, 농사에서 상공업 중시 등 정책의 변동, 서학인 천주교의 수용 등을 놓고 노선을 달리했다. 그리고 기존 체제로부터 음양의 피해를 봤다.조선은 두 번의 대전쟁과 패배,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한 대참사, 양반 관료들의 탐학, 성리학자들의 무능으로 붕괴하는 중이었다. 또한 신분제 일부가 무너지고, 외국과의 비자발적 교섭, 포로들의 귀환, 통신사와 연행사들의 견문 등으로 쇄국과 성리학의 맹신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붕괴의 진행을 막아야 할 조선의 선택은 ‘체제의 강화’란 시대의 반동 또는 부분적인 양보를 통한 개선이었다. 주류들은 전자를 택해 요행을 바라며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소외된 지식인들은 보편적 인성과 성리학의 원론에 충실하면서 사회 개선의 인식과 학문을 자생적으로 만들어갔다.이익은 재야의 자생적인 사상가로서 성리학의 관념성을 배격하고, 현실 개선의 방책을 전방위로 전개한 경세치용학파이다. 뒤를 이은 홍대용은 ‘북학’을 표방하면서 본격적으로 청나라와 서양 문물의 이론과 기술, 지식을 수용해 실생활에 응용하고 도움 주는 연구를 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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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절단, 지식·기술 배우려 하지 않고 외면…청나라 다녀온 북학파는 개혁과 실학 주체 돼
외국에 나가도록 승인받은 사람들은 국가가 파견한 관리와 상인, 수행원이었다.첫째는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이었다. 300~5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이 12차에 걸쳐 파견됐는데, 대마도에서 도쿄까지 왕복하는 데 거의 1년이나 걸렸다. 그들이 견문하고 체험한 18세기 일본은 자체 발전정책과 난학(네덜란드학)의 수입을 통해 새로운 지식, 기술 등을 보급받아 국력이 팽창했다. 김세렴·신유한·조엄 등 몇몇 인물이 일본 사회를 분야별로 분석하고 기록하며 난학의 우수성도 언급했다. 이들은 고구마를 들여오고, 수차 기술 등도 전달했지만 조선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개혁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 자체가 학습과 수용의 기회가 아니라 시혜와 과시, 일본의 군사적인 도발을 막으려는 회유였다. 따라서 그들의 자세는 자랑과 오만, 일본에 대한 멸시가 많았고, 보고서를 제출해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반면 청나라에 공식 파견된 연행사는 달랐다. ‘북학파’라는 세력으로, 조선 후기 사회 개혁과 실학의 초기 주체로 변신했다. 이들은 일단 규모가 컸다. 1회에 30명의 정식 인원과 수행원을 포함해 200~300명 정도가 파견됐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250여 년간 507회였으니 총인원을 고려하면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이다.압록강을 건너면서 박작성·구련성 등을 보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의 눈길과 가슴을 떠올린다. 불안한 조선의 현실을 떨치지 못한 채 사명의식과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봉금지대를 통과해 경계선인 봉황성(鳳凰城)에 닿았다. 이어 요양·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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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사회구조 개혁 필요한 상황에 처해…실용적인 사상·백성 위한 정책 구하려는 움직임
어느 시대에나 실패와 생명의 위협을 예견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식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1765년 35세의 홍대용은 연행사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에서 신세계를 경험한 뒤 신기하고 유용한 지식을 갖고 귀환했다. 이어 15년 후인 1780년 초여름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이 늦은 나이인 43세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단동시 외곽인 구련성에 닿자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이라고 잘못 인식한다. 이어 봉금지대를 통과해 청나라의 경계선을 넘어 봉황성에 이르자 고구려를 회고한다. 이미 역사를 공부하고 온 그는 성리학자들을 질타하고, <자치통감>까지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을 전개한다. 평양과 패수의 위치, 지명의 이동, 낙랑문제 등 예민한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북경을 거쳐 황제의 여름궁정인 열하까지 방문하고 다섯 달 만에 귀국했다. 그는 자료를 수집해 3년에 걸쳐 무려 26권에 달하는 기행문 <연암일기>를 썼다. 그가 죽을 때까지 수정 보완한 그 책은 필사본 때부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궁금하다.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닫힌 나라에 살던 조선사람에게 외국이면서 침략국이고 대국인 청나라의 문물과 실상은 신기함과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더구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문체로 쓰인 <호질전> <허생전> 등은 현실을 뼈아프게 풍자했으니 대리만족을 줬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청나라와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상호 비교하고, 조선에 필수적인 서양 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는 현실을 파악하는 학습서와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한 지침서 역할을 했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