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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엽관제, '서민 정치'를 명분 삼은 '패거리 정치'
흔히 ‘엽관제(獵官制)’라는 말로 번역되는 ‘spoils system’은 19세기 초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시기에 정착됐다. 오늘날 미국 2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자 최초의 ‘서민 대통령’이라는 평을 듣는 잭슨은 잭슨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라는 용어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엘리트 특권층에 의한 정부 독점’을 마감시킨 정치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서민 출신에게도 관직을 개방한 그의 엽관제는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제도이기도 했다.엽관제란 단어는 민주당 소속 뉴욕주 상원의원이던 윌리엄 마시가 1832년 “전리품은 승자에 귀속된다(To the victor belong the spoils)”라고 말한 데서 기인한다. 마치 전쟁에서 전리품을 노략질하듯 선거에 승리한 측이 국가의 공직을 나눠 갖는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단어를 누가 먼저 만들어냈느냐에 관계없이 엽관제라는 용어를 미국 사회에 정착시킨 사람은 잭슨 대통령이다. 잭슨 대통령은 당대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성공 신화’의 대표적 상징처럼 여겨진 인물이다. 그 이전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 부자(父子)가 동부 상류층 출신이었던 반면, 잭슨은 애팔래치아산맥의 서부 개척민 출신으로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대빵 왕(King Mob)’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 잭슨 대통령은 미국 역사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싸움꾼에 전문 말거래꾼(horse trader)인 동시에 땅투기꾼이었고, 서부 개척지의 변호사였으며, 거친 서부 개척 분위기의 새로운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당대인들은 그를 “가장 시끄럽고 주변 사람에게 꾸지람을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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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근대 국가의 주역, '영혼 없는' 관료주의
‘관료주의’라는 단어는 오늘날 부정적 의미로 주로 쓰인다. 과도한 형식과 규정에의 집착, 시장과 고객에 대한 지향과 배려의 부족, 비인간성, 무차별적 규제와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비효율의 대명사처럼 불린다.하지만 이런 평가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관료제·관료주의(Bürokratie)’라는 용어를 처음 학술적으로 확립했을 때 관점과는 큰 차이가 있다. 베버는 가산제(家産制)적 전근대 국가와 관료제적 근대국가를 여러 측면에서 대비시켰다.베버에 따르면 첫 번째로 가산제 국가는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지만, 관료제 정부는 비인격적이다. 여기서 ‘비인격적’이라는 것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돼 있으며, 특정 개인이 아닌 특정 직책을 보유한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둘째로 가산제적 국가는 아마추어가 운영하고, 관료제 정부는 해당 직무를 위해 훈련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차이가 있다. 관료제 정부하에서 관료는 국왕의 호의가 아닌 능력에 따라 임명되고, 국가로부터 고정 급여를 받으며, 자신만의 업무 원칙을 지닌 존재를 지칭한다.관료제의 세 번째 특성은 서류, 즉 ‘문서 우선주의’다. 가산제 국가는 많은 결정을 비공식적으로 내리는 반면, 관료제에서는 모든 것을 서면으로 기록한다. 넷째로 가산제 국가는 관리들의 업무를 전문화하지 않았지만, 관료제에서 관리들은 정교한 분업을 실행한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는 영역의 경계를 신중하게 정의한다. 다섯 번째로 가산제 국가는 관습과 선례에 호소하고, 관료제 정부는 이성과 법을 중시한다. 한마디로 베버에게 관료제는 “역사적 합리화 과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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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항해의 역사를 바꾼 경도의 발견
지금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GPS)’ 같은 각종 첨단 과학기술 덕에 항공기와 선박, 차를 탈 때 어렵지 않게 지도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지고, 어디를 둘러봐도 파도만 출렁이는 바다에서 가로·세로로 상상의 선을 긋고선 자신이 있는 곳을 확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개념상으론 ‘적도와 평행선’인 위도와 ‘남극과 북극을 잇는 선’인 경도는 인류사의 초기에 등장했다. 경도와 위도의 개념이 나온 근거는 기원전 2~3세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는 27장의 크고 작은 ‘세계지도’가 포함됐는데, 이 지도 위에 알파벳순으로 지명과 색인을 달고 선을 표시한 뒤 위도와 경도를 병기했다.위도에 대해선 프톨레마이오스 당시부터 이견이나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위도 개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적도가 ‘위도 0도’가 됐다. 기준선뿐 아니라 낮의 길이와 태양의 높낮이, 별자리 등을 통해 측정자가 자리 잡은 곳의 위도를 판단하는 기술도 고대부터 꾸준히 축적됐다.하지만 경도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경도 0도’인 본초자오선은 위도처럼 자연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에 따라 본초자오선의 기준이 그때그때 달라졌다. 아조레스 제도를 비롯해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가 모두 본초자오선의 기준점이 된 전력이 있다. 결국 최종적으론 19세기 대영제국의 힘을 바탕으로 런던(그리니치천문대)으로 ‘경도 0도’가 지나는 지점이 낙착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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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아라사'와 '노서아'를 다른 나라로 알았던 중국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아라사(俄羅斯), 노서아(露西亞). 러시아를 표현하던 옛 가차(假借)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기를 처음 만든 중국 청나라에서 아라사와 노서아는 단순히 표기법만 다른 게 아니었다. 적지 않은 기간 중국에선 아라사와 노서아가 다른 나라로 인식됐다. 아라사와 노서아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제 치세 후반부 때다.이처럼 하나의 나라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나라로 인식된 것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떨어진 지역을 지칭한 이유가 크다. 또 한쪽에선 전투, 한쪽에선 사절단이란 상이한 형식으로 러시아를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통역을 맡은 몽골인들의 ‘혀가 짧았던’ 것이었다.17세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접촉과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청나라 기록에 러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러시아 하바로프 원정대가 1653년 잉구타 아찬스크에서 청군과 충돌하면서다. 청나라 측 기록에 “나찰(羅刹·Rus, Ros의 음차어)과 전투했다”고 언급되면서 동양 사료에 러시아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하바로프의 후임으로 스테파노프의 선단이 또다시 아무르강에 등장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선정벌의 ‘나선(羅禪)’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만적들은 누런색의 비단옷을 입고 서양에서 온 것 같다”는 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러시아인에 대한 묘사다.비슷한 시기 제정 러시아는 청나라에 정식 사절을 파견했다. 몽골을 거쳐 들어온 이들 정식 사절의 출신국은 ‘악라사(鄂羅斯)’라고 불렸다. 악라사라는 국명은 ‘Oros’라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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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러시아 국기가 네덜란드 국기를 닮은 이유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1687년 크냐즈(옛 러시아의 제후, 公) 야콥 돌고루키가 외교 임무를 마치고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왔다. 훗날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어린 차르의 이복누이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섭정 통치하던 러시아로 그가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천체관측의가 있었다. 천체관측의는 나이 어린 표트르가 원하던 물건. 하지만 사용법을 모르는 꼬마는 크게 낙담했다. 마침내 그는 이 기계를 다룰 줄 아는 프란츠 티메르만이라는 이름의 젊은 네덜란드인을 찾았다.어린 표트르의 과학 교사이던 이 네덜란드인은 기초 수학부터 지리, 포격술, 요새 건설 등을 가르쳤다. 표트르의 지식 습득 수준은 들쑥날쑥했지만, 그는 ‘실질적인 모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 헛간에서 삼촌 니키타 로마노프 소유였던, 반쯤 썩은 영국식 보트를 티메르만과 함께 발견한 표트르는 네덜란드 목수 카르스텐 브란트의 지도 아래 이를 복원했다. 복원한 배로 야우자강을 운항했고, 결국 보다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는 플레셰에보 호수로 보트를 옮겼다. 그리고 이 장난감 배는 ‘러시아 함대의 조상’이 됐다.보트에서 표트르는 브란트와 함께 항해학을 공부했다. 브란트의 지도 아래서 표트르는 2척의 작은 프리깃함과 3척의 작은 요트를 만들었다. 꼬마 시절부터 그는 국가를 위한 거대한 대양함대를 꿈꿨다. 그의 조국은 단지 백해의 얼음과 안개 탓에 존재를 잊어버린 항구 아르한겔스크라는 단 한 개의 항구만 보유했지만 말이다.나이를 먹고 권력을 손에 쥔 표트르는 함대를 만드는 꿈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목수 브란트와 그의 20명의 동료가 함대를 건설하기 위해 플레셰에보 호숫가에 자리 잡았다. 조선소 주변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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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우편 시스템의 등장, 근대 국가의 시작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역참’으로 불리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고대 페르시아부터 중세 몽골제국까지 널리 사용됐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우편시스템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대국가의 주요 기반 중 하나인 근대 우편시스템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됐다. ‘데 타시스(de Tassis)’라는 라틴어화된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타소 가문이 우편시스템 등장에 큰 역할을 했다.타소 가문 내에서도 1459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역의 코르넬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타소는 이 시스템을 일군 핵심 인물이다. 그는 자기 가문이 베네치아에서 공화국에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기업인 ‘콤파니아 데이 코리에리(Compagnia dei Corrieri)’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란체스코 타소 가문의 다른 분파(산드리 가문)는 로마교황청에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1489년, 프란체스코의 형인 이아네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1세의 우편 서비스 책임자가 됐다. 세기말에는 무상으로 우편 서비스를 시행한 보상으로 이아네토가 오스트리아 케른텐 지역의 광산과 봉토를 받았다.하지만 가문의 사업을 다른 수준으로 높인 것은 프란체스코였다. 광산이 타소 가문의 중요한 수입원이긴 했지만, 타소 가문에게 두드러지는 부를 안긴 것은 우편 서비스였다. 프란체스코는 유럽 대륙 전역의 우편 서비스 조직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프란체스코는 1490년에 우편 마차와 말을 교대하는 최초의 상설 우편 노선을 구축했다. 이 노선에서는 편지가 들어 있는 봉인된 가죽 가방이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다. 우편 마차가 밤에도 운행했기 때문에 이동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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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소금과 청어로 일어선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17세기 초·중반 세계무역을 주도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물자 교환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학자 판 데르 쿠의 지적처럼, 17~18세기에는 유럽 대륙 물자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중앙 저장소 역할까지 수행했다.네덜란드 성장의 발판은 처음에는 소금, 곧이어서는 청어가 담당했다. 네덜란드가 국제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발트해 교역에서부터다. 원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 발트해 주변 지역에선 필요한 소금을 북독일이나 폴란드의 암염 광산에서 생산한 암염으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사용했다.하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발트해 지역의 소금 교역은 네덜란드인의 주무대가 된다.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 서부 지역과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생산하는 풍부한 바닷소금을 공급하며 부를 쌓았다. 곧이어 프랑스산 와인 등으로 교역 품목을 확대했다. 벌크선을 통한 각종 화물 교역도 점차 늘려나갔다.소금 교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적잖은 위기와 저항도 있었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네덜란드와 대립하면서 스페인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엠바고를 시행했다. 이베리아반도산 소금 무역에서 네덜란드 상인이 축출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한자동맹 상인들은 선박이 부족해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북유럽에서 소금 부족 현상이 심해지고 소금 가격이 급상승하는 부작용만 빚어졌다.이베리아반도에서 소금을 얻기 힘들어지자, 네덜란드는 1621년 이후 포르투갈산 소금 교역 비중을 줄이는 대신 서부 프랑스산 소금으로 대체를 시도했다. 하지만 프랑스산 소금은 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생선 저장용으로 부적합했고,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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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극단적 권력투쟁의 산물 '형제 살해' 전통
1574년 12월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술탄 무라드 3세의 즉위에 앞서 이스탄불 시민들은 선왕의 관이 술탄의 궁전에서 아야소피아에 자리한 무덤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봤다. 행렬 뒷자락에는 5명의 어린 왕자들의 관이 뒤따랐다. 1595년 메흐메드 3세가 즉위할 때는 “19명의 무고한 왕자가 어머니의 품에서 끌려 나와 신의 자비 안으로 들어갔다”고 당대의 역사가 페체비는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오스만제국 관습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새 술탄이 즉위하면 동복, 이복,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술탄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형제 살해’의 전통을 꼽을 수 있다. 이 전통은 왕위 계승권의 경쟁자를 제거해 왕권의 안정을 취하는 제도 중 가장 극단적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왕위 계승 경쟁자를 물리적·제도적으로 모두 죽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오스만제국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왕위 승계가 이뤄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근원적 문제는 하렘 조직이었다. 대부분의 술탄은 하렘의 신분이 낮은 첩들을 총애했고, 여러 첩의 자식들이 술탄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심지어 노예 출신 첩의 자식들이 술탄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흔했다. 노예로부터 후사를 얻는 관행은 무라드 1세 때부터 확립됐는데, 무라드 1세의 후계자인 바예지드 1세의 어머니는 ‘귈치첵(Gülçiçek, 장미)’이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자유민이 아니었다. 연대기 작가 슈쿠룰라는 “바예지드 1세는 에르트구룰, 술레이만 공(아미르), 술탄 메흐메드 1세, 이사, 무사, 무스타파 등 6명의 아들을 뒀는데 이들은 모두 노예 어머니 소생”이라고 전한다. 그의 아들 메흐메드 1세도 후일의 무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