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대항해시대의 주역
지중해 중심으론 서쪽 끝 소국에 불과하지만
큰 그림을 놓고 보면 대서양 잇는 관문
포르투갈, 종교적 명분 내세워 세우타 침공
주앙 1세 셋째 아들, 대항해시대 주인공 돼
지중해 중심으론 서쪽 끝 소국에 불과하지만
큰 그림을 놓고 보면 대서양 잇는 관문
포르투갈, 종교적 명분 내세워 세우타 침공
주앙 1세 셋째 아들, 대항해시대 주인공 돼

1870년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초등학생이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시비를 건 것과 같은 무모한 도발이었다. 사람 머릿수가 국력이던 시대에 인구가 7배나 더 많은 국가를 상대로 한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당시 프로이센은 영국의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영국이 천사라서 그런 게 아니다.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놓고 프랑스와 패권을 다투던 영국으로서는 프랑스 군인을 단 한 명이라도 유럽에 더 묶어두어야 했기에 프로이센을 대륙의 검(劍)으로 활용한 것이다. 후에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는 아메리카 정복은 아메리카가 아니라 독일에서 이루어졌다고 촌평했다. 모호할 때, 이해가 안 갈 때 큰 그림을 보면 답이 나온다.포르투갈, 지중해의 변두리였지만…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거대한 사건으로, 오스만제국이 팽창하면서 동지중해가 막힌 것이 그 기원이다. 이론상 대항해시대의 주역은 이탈리아 부자 도시국가들이어야 맞다. 그러나 막상 대항해시대에 개막전 투수로 나선 것은 뜻밖에도 소국(小國)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지중해의 변두리다. 이 말은 지중해 무역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보면 전혀 다른 지정학적 견해가 나온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면 서쪽 끝이지만, 아메리카 대륙까지 나오는 큰 지도를 보면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지점이 바로 포르투갈인 것이다. 큰 그림을 보면 이유가 보인다.왕조의 위신 세우기가 촉발한 세우타 점령처음부터 대항해 시대를 목적으로 한 공정이 착착 진행된 것은 아니다. 역사의 절반은 ‘어쩌다 보니’가 그 이유다. 포르투갈의 ‘어쩌다’는 1385년의 ‘부르주아혁명’이 시작이었다. 혁명으로 탄생한 아비스(Abiz) 왕조의 창업주 주앙 1세에게는 세상이 다 아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서자라는 출신 성분이다.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되는 적자와 달리 서자에게는 업적을 만들고 위신을 세워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는 전쟁을 통해 이를 달성하려 했고, 북아프리카의 전략적 요충지인 세우타를 목표로 정한다. 현재의 모로코 최북단인 세우타는 이슬람 계통의 마린 왕조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린 왕조는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그라나다를 지원하는 군대와 식량이 출발하는 곳이 세우타였기에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일단 종교적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바다에 푹 빠진 포르투갈의 왕자아무리 신앙의 시대인 중세라지만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전쟁을 종교적 이유만으로 벌이지는 않는다. 세우타는 지중해의 주요 상업항으로 곡물창고에는 북아프리카와 유럽 각지로 팔려나갈 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415년 모로코 북쪽 바다에 포르투갈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우타 총독은 실소를 참지 못했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함대는 해협의 물살과 바람을 이기지 못해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었다. 육전(陸戰) 경험이 전부인 포르투갈의 ‘기사’ 지휘관들은 바다를 몰랐고 배를 이끌어야 하는 도선사들은 지브롤터 해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전투 선단과 수송 선단이 둘로 분리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한 끝에 포르투갈 함대는 출항지로 돌아가야 했다. 세우타 해군이 출동해 이들을 박살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3주 후 다시 바다로 나선 포르투갈에 이번에는 신의 은총이 함께했고 13시간의 전투 끝에 세우타는 함락된다. 이때 큰 공을 세운 이가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인 엔히크로 나중에 대항해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되는 인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