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에스파냐·포루투갈의 신세계 쟁탈전
포르투갈, 콜럼버스 발견 신대륙 뺏으려 해
에스파냐, 교황 등에 업고 외교 분쟁에서 승기
교황, 수직선 그어 동·서쪽으로 영토 나눠
주앙 2세, 협상 통해 서쪽으로 기준선 밀어내
이후 발견된 브라질, 포르투갈 식민지 돼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가 짓궂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시기와 질투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일가에서 형이 동생을 죽였다. 살인이 포인트가 아니다. 시기와 질투가 핵심이다. 서양 속담에 이런 게 있다. “가장 큰 고통은 친구의 성공을 지켜보는 것.” 이때 친구를 동료, 친척, 부하 등으로 바꿔도 상관없겠다.포르투갈, 콜럼버스 발견 신대륙 뺏으려 해
에스파냐, 교황 등에 업고 외교 분쟁에서 승기
교황, 수직선 그어 동·서쪽으로 영토 나눠
주앙 2세, 협상 통해 서쪽으로 기준선 밀어내
이후 발견된 브라질, 포르투갈 식민지 돼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을 보며 선조가 느낀 감정도 질투였을 것이다.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이순신의 수명은 그만큼 앞당겨졌다. ‘키 큰 양귀비 신드롬tall poppy syndrome’은 질투를 활용한 성공적인 사례로 만들어진 용어다. 로마가 왕정이었을 무렵 한 왕이 아들을 경쟁 도시에 거짓 투항시킨다.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묻는 아들에게 왕은 양귀비밭에서 홀(笏, staff)로 키가 큰 양귀비를 쳐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은 서민들이 상류층에 가진 질투심을 이용해 경쟁 도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켰다. 근현대에서 이 질투가 집단으로 전염되는 경우를 우리는 ‘공산주의’라고 부른다.에스파냐가 발견한 아메리카, 알고 보니 포르투갈 영토?역으로 하면 가장 신나는 자랑이 질투심 느끼는 상대에게 늘어놓는 성공담이다. 자신에게 찾아올 수 있었던 행운을 놓친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7개월의 항해를 마친 콜럼버스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주앙 2세였다. 그의 배가 폭풍으로 리스본에 기착했기 때문인데 주앙 2세는 즉시 콜럼버스를 왕실로 불러들였다. 항해가 어땠느냐는 왕의 질문에서 그는 시기와 질투를 읽었다. 황금도 없었고 아시아의 가톨릭 군주도 만나지 못한 그저 육지의 발견이었지만, 콜럼버스는 초라한 경험에 화려한 덧칠을 하며 자신의 항해 계획을 퇴짜놓은 주앙 2세에 대한 분노를 해소했다.
콜럼버스의 이야기 속에서 차츰 본 것과 보고 싶었던 것의 경계가 흐려졌고 희망 사항이 현실로 둔갑했다. 물론 콜럼버스가 데리고 온 인디언(?)의 꾀죄죄한 몰골을 보면서 황금 계곡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듣는 내내 주앙 2세의 속이 쓰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말에 취한 콜럼버스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주앙 2세의 표정이 흐뭇하게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알현이 끝날 무렵 주앙 2세는 콜럼버스에게 말했다. “짐의 영토를 발견해주어 고맙도다.” “네?”중세의 UN, 교황이 영토분쟁에 개입하다주앙 2세가 갑자기 행복해진 것은 1479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맺은 알카소바스 조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체결한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이사벨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는 대신 대서양 몇몇 섬에 대한 소유권과 아프리카 해안 지대에 대한 권리를 포루투갈에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르투갈이 조약으로 확보한 영토는 카나리아제도 남쪽 대서양 북위 26도 이남 지역이었고, 콜럼버스가 침을 튀겨가며 자랑한 인도 역시 북위 26도 이남이었으니 주앙 2세가 쾌재를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고를 치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주앙 2세가 자리를 뜬 다음에도 콜럼버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서 있었다.
콜럼버스는 항해 전 에스파냐 왕실과 협상하며 앞으로 자신이 발견할 모든 육지와 섬의 통치권과 그 지역에서 생산하는 보석과 향신료의 10분의 1, 그리고 그 지역에 정박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이윤의 8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약속받았다.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급히 바르셀로나로 사람을 보냈다.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가로채려 한다는 급전에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국왕은 머리를 싸맸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제일 쉬운 것은 전쟁. 그러나 부부 왕은 이를 외교로 해결하기로 한다. 15세기 말 유럽의 국제 규정상 비(非)가톨릭 영토의 통치와 주권은 교황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리고 당시 교황이 에스파냐 출신인 알렉산데르 6세였다. 교황은 1493년 5월 3일 첫 번째 칙서를 발표한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에 에스파냐 왕실 사절단을 보내 그곳이 가톨릭 국가가 아닐 경우 통치권을 인정한다고 한 것이다. 주앙 2세는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며 반발했고 두 번째 칙서가 발표된다.1세대 제국주의 국가들의 황당한 신세계 분할교황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새로운 영토 분계선을 제안한다. 이번에는 위도가 아닌 경도, 즉 세로로 양국의 영토를 규정했는데 가상의 수직선을 그어 선의 동쪽에서 발견되는 영토는 포르투갈에, 선의 서쪽에서 발견되는 영토에는 에스파냐에 각각 권리와 사법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앙 2세는 에스파냐 부부 왕과 1년여 협상을 벌인 끝에 이 선을 서쪽으로 좀 더 밀어낸다. 이게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이 조약 덕분에 그때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던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현재 남미에서 유일하게 에스파냐어를 쓰지 않는 나라가 된다.
유럽 다른 나라들이 이런 장난질 같은 조약을 그대로 보고 있을 리 없었다. 프랑스 국왕은 세계의 반쪽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담의 유언장에 나와 있다면 그게 몇 조 몇 항에 있는지 보여 달라며 비웃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바다는 만인의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조약을 무시해 버렸다. 이때부터 바다와 미지의 땅을 둘러싼 각축전이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는 시대, 본격적인 제국주의시대의 개막이다. 본문과 별 관계는 없지만, 친구 이야기로 글을 열었으니 같은 소재로 마무리한다. 진정한 친구는 슬픔을 같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진정한 친구는 동료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