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메카의 성장과 무함마드의 탄생

실크로드 상인들 쉬어가던 오아시스 '메카'
무역 중심지 급부상…신흥 종교 확산 통로로

메카는 원래 수백 개의 신전이 있던 곳
신 찾아오는 순례자 상대 돈 벌던 귀족들
무함마드 발언에 '밥 줄' 끊길까 걱정해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는 동로마 황제가 사산 왕에게 포로로 잡히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마애(磨崖) 조각상. 무릎 꿇은 이가 발레리아누스 황제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나중에 후대인이 붙인 이름이고 당대에 쓰인 국호는 ‘에란샤’였다. ‘아리아인의 왕국’이라는 뜻으로 국호인 이란의 어원이다.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는 동로마 황제가 사산 왕에게 포로로 잡히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마애(磨崖) 조각상. 무릎 꿇은 이가 발레리아누스 황제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나중에 후대인이 붙인 이름이고 당대에 쓰인 국호는 ‘에란샤’였다. ‘아리아인의 왕국’이라는 뜻으로 국호인 이란의 어원이다.
300년 전쟁과 메카의 성장모든 제국에는 숙적(宿敵)이 있다. 굳이 한자로 쓴 이유는 숙(宿) 자가 숙명(宿命)에도 쓰이고 숙변(宿便)에도 쓰이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적인 동시에 오래 묵은 적이다. 딱히 대등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만하지도 않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다. 전성기 로마의 숙적은 파르티아였다. 로마 시민 절반을 채무자로 두었을 만큼 돈은 많았지만 군사적 업적은 초라하던 로마 삼두정치의 한 축인 크라수스가 공명심에 침공을 감행했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은 것도 파르티아와 벌이던 전쟁에서다. 로마에게 수도를 세 번이나 점령당하면서도 버티던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것은 사산(Sassanid)왕조(사산조페르시아)다. 그리고 사산왕조는 동로마제국의 파르티아였다. 중간에 아르메니아라는 완충지대가 있었던 로마 vs 파르티아와는 달리 동로마와 사산왕조는 거의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당연히 둘은 내내 싸웠고 사산왕조 427년 동안 서로 바빠 전쟁을 못했던 379년에서 498년까지 120년을 뺀 300년이 거의 전쟁 상태였다. 이를 보통 ‘300년 전쟁’이라 부른다. 닫힌 실크로드, 새로운 무역 경로를 찾아서조금 큰 규모의 오아시스 도시이던 메카가 급성장한 이유도 300년 전쟁 때문이다. 중국 시안에서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카스피해 남쪽을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실크로드가 막힌 것이다. 고대와 중세 무역은 한두 배 남는 장사가 아니다. 길이 없다고 수십 배, 어떨 때는 수백 배 남는 장사를 포기할 상인은 없다. 이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하나는 바닷길인데 아라비아반도를 끼고 홍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또 한 무리는 실크로드 아래 아라비아 사막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막을 건너 북상하면 바로 동로마제국의 영토다. 둘 다 쉽지 않았다. 특히 사막 길의 경우 건너야 할 사막의 길이만 무려 2000km에 달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상인들은 과감히 목숨을 건 여정에 나섰다. 바닷 길이든 사막 길이든 쉬어 갈 곳이 필요하다. 그게 메카였다. 게다가 메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리아의 중심지인 다마스쿠스로 가는 루트가 만들어져 있었으니 가산점 추가.

종교가 태동하는 것과 그게 전파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종교가 있어도 북극이나 남극 오지에서 탄생한다면 결코 세계 종교가 될 수 없다. 종교의 전파에는 운송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교 역시 로마의 길을 따라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무역의 중심지이던 메카는 신흥종교가 확산될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슬의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의 탄생570년경 이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태중에 있을 때 사망했고, 어머니 역시 그가 여섯 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그를 거둔 것은 할아버지였지만 바로 세상을 떠나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손에 맡겨진다. 무함마드는 열두 살 나이에 독립한다. 잘나서가 아니다. 아랍 사회에서는 그 나이까지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 무함마드가 고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와 예멘을 오가는 대상(隊商)에 합류한 무함마드는 장사를 배우고 더 큰 세상을 경험한다. 무함마드는 스물이 넘어서도 결혼을 못 했다. 지참금이 없으면 결혼이 불가능하던 시대, 무함마드는 사촌누이에게 청혼했다가 삼촌에게 면박만 당한다. 이 무렵 메카 최고의 부자인 카디자라는 미망인이 무함마드를 스카우트한다. 5년간 피고용인으로 일하던 무함마드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 카디자의 남편이 된다. 당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열다섯 살. 돈과 젊음의 교환이었다. 결혼 후 무함마드는 관리직으로 자리를 옮긴다. 대상 행렬이 다마스쿠스에 다녀오는 시간이 6개월이다. 관리자에게는 그 동안 할 일이 없었고 무함마드는 동굴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세칭 ‘영(靈)발’이 가장 좋은 장소가 바위가 많은 곳이다. 유럽의 유명한 수도원은 대부분 바위산이나 바위절벽에 자리한다. 이는 고대의 전통으로, 모세가 기도하다 신을 만난 시내 산은 오로지 돌뿐인 곳이다. 무함마드가 기도한 동굴 역시 자발 알 누르라는 바위산 중턱이다. 높이 2m에 길이가 3.7m에 불과한 이 작은 동굴에서 무함마드는 15년을 기도하고 명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을 만난다. 유일신이라는 위험한 생각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포교 첫해의 스코어는 별로였다. 무함마드의 말에 넘어간 사람은 가족, 친구, 친척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하인까지 다해 70여 명이 전부였다. 이들은 얼굴을 봐서 그냥 믿어주기로 한 사람들이다.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면 된다. 지지자는 없었지만 적대자는 많았다. 특히 메카를 지배하던 귀족세력들은 무함마드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메카에는 수백 개나 되는 신을 모시는 대신전이 있었고, 귀족들은 자기가 믿는 신을 알현하러 메카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익을 챙겼다. 그런데 유일신이라니. 자칫하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길 수도 있는 위험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함마드는 우리 모두는 형제라고 했다. 예수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며 로마를 뒤흔들어놓은 것처럼 무함마드의 이 발언은 메카 귀족들의 혈압을 올리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