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한 땅 통치 위해 '스페셜리스트' 기용
전문가 키우고 '기술 인력' 영입도 힘써
눈병 치료하려 이란인 의사 초빙도

여러 민족서 전문가 차출해 재배치
통역사·농부·요리사까지 동서로 인력 교환
기술 이전 위해 위구르 문자를 공용문자로
재무관료는 실적 따라 등용, 승진 보장
칭기즈칸 초상  위키피디아
칭기즈칸 초상 위키피디아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라즘과의 일전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라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라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 전선 650km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몽골군이 나타나자 방위병들은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 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몽골의 군사력은 단순히 병사 수가 많고, 개개인이 싸움을 잘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몽골군은 정복한 국가의 인재를 활용하는 데서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사고가 유연했다. 칭기즈칸 휘하 맹장인 제베와 수베데이가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에 도착했을 때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을 활용해 방패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놓고 싸울 정도였다.

결국 이 같은 몽골군과 직면한 호라즘은 속수무책이었다. 코끼리 부대를 포함해 호라즘의 정예 엘리트 군단이 지키고 있던 사마르칸트 역시 부하라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 사마르칸트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의미한 항전을 포기했고 며칠 만에 성문을 열었다. 몽골에 항복한 시민들은 도시 밖으로 보내졌고, 도시는 약탈이 자행됐다. 1221년이 되면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총 10만 명의 장인들이 몽골과 중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순간을 동서 제국의 인적교류가 활성화된 때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이 시기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위상이 높아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칭기즈칸은 1206년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에 취임했을 때부터 “펠트 천막에 사는 모든 사람의 칸”을 표방했다. 단순히 몽골족뿐 아니라 몽골평원에 사는 모든 유목 부족이 그의 휘하라고 선포한 것이다. 당시 몽골어에서 ‘국가’를 의미하는 ‘울루스(ulus)’라는 단어도 오늘날의 국가에 비해 ‘사람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몽골의 백성’에는 혈연이나 언어 측면에서 원래 몽골족에 가까운 사람들뿐 아니라 스스로 자원해서 외부로부터 편입된 사람들이 모두 포함됐다.

몽골 초원을 활동공간으로 삼을 때만 하더라도 유목민에겐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한 각종 ‘일반 지식’이 중요했다.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장점이 요구됐던 것이다. 하지만 방대한 정주 지역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뒤에는 이를 유지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하다고 칭기즈칸은 판단했다.

이를 위해 칭기즈칸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고, 초빙하고, 육성했다. 종교와 군사기술, 직조(織造), 천문학, 의학 등의 분야에서 이 같은 성향이 두드러졌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란인 의사를 초빙했다. 고위급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기술 인력’의 도입도 활발했다. 중국에서 차출된 농부들은 아제르바이잔이나 메르브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의사와 천문 관측사, 통역사, 기술자, 심지어 요리사도 동서 제국 간에 교환됐다. 이슬람권에서 발달한 의학과 천문학, 지리학 관련 지식은 이들을 통해 동방에 전수됐다.

개방성에 근거해 몽골제국이 건설된 시기는 세계 각지의 인재들이 활발하게 교류된 때이기도 했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 지배층은 초원과 정착 문명 사이에 있던 지역 출신 인사를 선호했다. 거란인이나 위구르인, 호라즘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위구르족은 ‘관료 풀(당구)’의 충원지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은 초원과 도시 모두에 익숙했다.

칭기즈칸은 제국 각지에 여러 민족에서 차출한 각 분야 전문가를 재분배했다. 그리고 의사소통과 기술이전을 편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1204년 공용 문자로 위구르문자를 도입했다. 문자 전문가들로는 위구르족을 발탁해 고용했다. 나이만족 포로 출신인 타타통아에게 위구르문자 보급과 공식적인 법령에 제국의 옥새를 찍어 서명하는 중책을 맡겼다. 칭기즈칸 본인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주 지대 제국 통치를 위해선 문자 도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선선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타타통아 외에도 무슬림으로 트랜스옥사니아 지역 최초의 몽골 총독이 됐던 마흐무드 얄라바치와 마수드 백, 거란인 출신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 등이 칭기즈칸을 보좌했던 현지 전문 관료들이었다. 위구르족 출신 친카이(鎮海)와 여진족 출신 충산(粘合重山) 등도 칭기즈칸 밑에서 궁정 관료로 활약했다.

특히 주목받았던 것은 재정 전문가들이었다. 재무관료들은 세금 징수, 재무 운영 등에서 실적에 따라 등용되고 ‘승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재정 분야에서 위구르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칭기즈칸 사후 원나라 지배 시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란 뜻의 ‘제색목인(諸色目人)’의 준말인 ‘색목인’이라고 불린 티베트, 위구르, 킵차크, 캉글리, 알란인과 이란 아랍 계통의 무슬림이 동원됐는데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재정과 행정 분야는 위구르인들이 주를 이뤘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침략지역 인재까지 활용…칭기즈칸의 제국경영
몽골제국은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피정복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세계 제국을 운영할 때도 광범위한 ‘협력자’들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이 같은 몽골식 강제 인적 교류와 확장, 전문 인력의 채용과 세계화는 몽골제국이 틀을 잡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몽골제국은 ‘무식한 야만인’의 이미지가 후대에 씌워지긴 했지만, 거대 제국을 운영하기 위한 고도의 재정정책을 시행하는 데 결코 후진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대제국은 아무나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