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
1925년 서울 소공동 일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1925년 서울 소공동 일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600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으면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우리 땅의 아픈 역사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김주혜 작가는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영어가 더 익숙한 작가는 <작은 땅의 야수들>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했다.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을 2021년에 펴냈고, 세 군데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오른 끝에 2024년 톨스토이 재단이 주관하는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야스나야 폴랴나상(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TV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민족의 아픈 역사 견디게 한 힘은 사랑과 믿음
<작은 땅의 야수들>은 1917년이 배경인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1부는 3·1운동이 일어난 1918~1919년, 2부는 일제강점기에도 문화가 꽃피는 경성을 그린 1925~1937년, 3부는 태평양전쟁과 광복·정부수립 시기인 1941~1948년, 4부는 국가의 기강을 잡아나간 1964년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부터 마지막까지 각종 복선과 효과적인 소품, 필연적 관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긴 이야기지만, 의미 있는 장치들이 무게를 더하며 확산되어가는 과정이 묘미를 안기는 작품이다.

소설 속에는 일본인과 친일파, 공산주의자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들은 정보가 없어 판단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다. 예를 들어 3·1운동을 준비하는 명보에게 친구 성수는 “진정한 권력이 없는 독립선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본인들이 행하는 압제를 더욱 강화할 뿐이야. 수천 명이 체포되어 연행될 거고, 더 심한 일도 벌어지겠지”라며 회의적 반응을 보인다. 일본인 장교들은 “일본은 아시아 대륙 전체를 비추고 새로운 계몽의 시기로 나아가도록 그들을 이끌어줄 태양”이라고 자신한다. 과욕을 부리는 일본, 힘이 없어 당하기만 한 조선이 상황이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세 소녀가 펼치는 대서사시<작은 땅의 야수들>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여성은 기생이다. 당시 여성들은 교육받을 수도 없었고, 당연히 자아실현의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기생이 되면 기본적인 학문을 닦는 것은 물론 춤과 노래를 익혀 배우나 가수로 활동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평양 기생 은실에게는 너무도 예쁜 월향과 평범한 외모의 연화라는 두 딸이 있다. 가난한 집 딸인 옥희는 기생집 숙식 세탁부로 취직하려다 우여곡절 끝에 기생 수업을 받는다. 어느 날 찾아온 일본 장교가 억지로 월향과 동침하고, 임신하게 된다.

은실은 딸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다닐 것 같아 경성 기생인 단에게 월향과 연화, 옥희를 보낸다. 경성 최고 미녀인 단은 연화와 옥희에게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일제강점기에도 경성은 화려하고 시끌벅적하다. 노래를 잘하는 연화는 유명 가수가 되고, 옥희는 배우로 활동한다. 월향은 통역관으로 일하다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으로 간다. 연화는 엄청난 부자의 애첩으로 살면서 아기를 낳지만 차츰 아편에 중독된다. 큰 집을 지키며 단과 함께 사는 옥희는 가난한 인력거꾼 한철을 사랑해 대학 교육까지 받게 하지만, 한철은 부잣집 여성과 결혼한다. 어릴 때부터 옥희를 좋아해 주변을 맴돌며 도와주는 정호를 옥희는 친구로만 생각한다. 잊어서는 안 될 우리 역사엄마처럼 따르던 단 이모가 세상을 떠났고, 배은망덕한 한철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마음 아프다. 늘 자신을 도운 정호는 공산주의 이력 때문에 고초를 당하지만 도울 힘이 없다. 이제 노년이 된 옥희, 제주도에 가서 물질을 배우며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간 해녀의 아기를 돌본다.

프롤로그에 등장한 호랑이가 작품 곳곳에서 어흥 소리를 내며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이어간다. 호랑이와 맞섰던 정호 아버지에게 전한 은실의 반지가 정호를 거쳐 옥희의 손가락에 안착하고, 일본 부총리를 저격한 정호는 아버지가 물려준 담뱃갑의 주인인 일본인을 만난 게 오히려 화가 되어 아픈 최후를 맞는다.

이근미 작가
이근미 작가
긴 여정 내내 흘러넘친 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제아무리 각박하고 위급해도 사랑만큼은 어디서든 빛을 내고 힘을 준다는 걸 이 소설은 격정적으로, 진정성 있게 그려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선명하고 묵직하게 전해준다. 잊어서는 안 될 우리 역사를 전 세계에 알린 것도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