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기타
18세기 조선의 미(美)…달항아리
지난 호에서 저는 100년이나 걸려 완성된 개혁 민생 법안 대동법을 언급하였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대동법이 완성된 직후부터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그 후 100년 동안이나 유행을 지속한 최고의 예술품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숙종 말년부터 영조 시기에 최절정의 예술적 완성도를 뽐낸 문화재이자 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는 백자, 바로 18세기의 ‘달항아리’가 그것입니다.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은 ‘달항아리’사실 백자는 이미 고려 시기부터 제작되었고, 중국의 징더전에서 제작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백자가 엄연히 존재하였지요. 더구나 조선에서도 이미 세조의 통치 후반이었던 15세기 후반에 경기 광주 일대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소, 즉 ‘관요’을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시대하면 곧 백자를 떠올릴 만큼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백자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오롯이 담은 최고의 미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고결하고 검소하면서도 청렴한 성인 군자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드러난 도자기가 바로 백자였습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무나 이 백자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성인 군자를 상징하는 왕이 사용하는 그릇이기 때문이지요. 실제 15세기 후반 『경국대전』에는 백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청화백자를 왕실이 아닌 신분이 사용하면 장 80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어요. 그만큼 왕실이 백자를 독점하였던 것이고요.반대로 양반 사대부 입장에서는 성리학적 고결함을 담은 이 백자를 『경국대전』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어했지요. 그래
-
경제 기타
경기변동과 IT전당포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유망하기를 바란다. 구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분야 또는 앞으로 종사하게 될 직업이 각광받기를 희망한다. 직업의 안정성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거니와 벌이 면에서도 유망 직종이 유리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떤 직업이 현재 유망하고 또 앞으로 각광받게 될까. 직업의 흥망성쇠는 우리 사회가 처한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전망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2000년대 초반 정보보안 전문가가 각광받았던 것은 정보기술(IT) 발달로 개인정보의 보호가 과거와는 다르게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사회복지사가 유망 직업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1인 가구의 폭발적 증가로 복지 수요가 머지않은 미래에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유망 직업은 현재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미래 사회가 어떠할지를 예측하는 길라잡이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물론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겠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의 흐름, 즉 경기변동을 파악해보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경기변동(business fluctuation)이란 경제활동이 어떤 형태로 변화하고 또 이를 유발하는 사회적경제적 원인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경제학 이론을 말한다. 쉽게 말해 경제가 어떤 흐름으로 변모하는지,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경기변동인 것이다.그렇다면 경기변동은 어떤 요인들에 의해 발생할까. 우선 수요의 측면에서 볼 때, 미래에 대한 사람들
-
역사 기타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17세기는 한편으로 전쟁의 시대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서서히 상품 경제가 발전하는 이른바 ‘상업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혼란기였으나 이미 명대에 들어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외래 작물의 보급과 양쯔강 중류의 발전으로 상업에서도 활기를 띠었지요. 일본에서는 17세기 초에 에도 막부가 일찍 들어서면서 지역별로 거점 도시가 발전하는 양상을 띠며 조닌이라는 상공업자들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조선 후기 사회의 활력소, 대동법조선의 상황은 좀 더 극적입니다. 이미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됐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전을 거듭하며 시장과 상업의 물꼬가 트이며 조선 후기 사회가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요인은 바로 ‘대동법’입니다.대동법은 간단히 말하면 기존 공납제를 쌀로 환산해 내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이 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데 걸린 시간만 무려 100년입니다. 그리고 이 대동법의 원인이 되는 공납제의 문제점은 이미 16세기부터 드러났고 우여곡절 끝에 대동법이라는 개혁 법안이 탄생하게 됩니다.사실 조선은 과전법이라는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을 보호하면서 대신 전세(토지세), 공납(토지세), 역(군역과 요역)이라는 수취 체제를 만들어 톱니바퀴처럼 국가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차 양반지주 등이 더 많은 토지를 가지려 하고, 탐관오리들
-
경제 기타
완전경쟁시장과 웨딩 플래너
경제학에서는 시장을 특성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한다. 독점시장, 과점시장, 독점적 경쟁시장, 완전경쟁시장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완전경쟁시장은 가장 이상적인 시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시장원리에 따라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유롭게 거래할 경우 사회 전체의 만족이 가장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완전경쟁시장은 다른 시장과 다른 어떠한 특성을 갖고 있기에 이러한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을까?먼저 완전경쟁시장은 다수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있는 시장이다. 완전경쟁시장에는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사람도 다수이고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도 다수라서 특정 경제 주체가 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시장을 말한다. 따라서 각 경제 주체들은 자신의 수요량이나 공급량을 줄이거나 늘려도 시장가격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시장이다. 다시 말해 완전경쟁시장에 참여하는 경제 주체들은 가격 순응자이다.두 번째로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가 모두 동질적이어서 완전대체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공급자나 수요자 모두 제품들이 동일한 물건들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가격 순응자가 되기 위해서도 필요한 요소이다. 특정 제품마다 소비자나 공급자가 다른 제품이라고 평가하게 될 경우 해당 제품에는 다른 가격을 부여할 수 있게 되지만, 제품이 다른 제품과 동일한 제품이라고 생각될 경우 동일한 가격이 부여될 것이기 때문이다.세 번째로 공급자나 소비자는 가격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물건에 한 가지 가격만이 존재하는 시장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공급자가 파는 물건이 다른 공급
-
역사 기타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어떻게 사회 질서를 회복시켜나갔을까요. 한편에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 운동이 추진됐으며 또 한편에서는 성리학적 예법을 바로 세우려는 양반 지배층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북벌을 추진하던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던 효종이 의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정점이라는 예송논쟁으로 조선은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어떤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을 것이냐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그에게는 형이 있었죠. 바로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입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이미 소개된 서구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중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는 오히려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둘째였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효종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스승이 있었죠. 한 명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어부사시사>의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남인 계열의 윤선도이며, 또 다른 이는 율곡 이이를 계승하고 김장생에게서 예법을 배운 서인 계열의 우암 송시열입니다. 둘은 같은 성리학을 탐구했지만 학문적으로 미묘하게 갈라지며 경쟁관계기도 했죠. 주자의 성리학을 누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 구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효종이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나자 상복 문제로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현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
경제 기타
의사의 연봉이 높은 이유는 보상적 임금격차 때문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나의 스승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다. 나의 의술을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겠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겠다. 나의 환자에 관한 모든 비밀을 절대로 지키겠다.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다. 나는 동료를 형제처럼 여기겠다. 나는 종교나 국적이나 인종이나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 나는 생명이 수태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하겠다. 어떤 위협이 닥칠지라도 나의 의학 지식을 인륜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의 명예를 걸고 위와 같이 서약한다.”이상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제네바 선언(Declaration of Geneva)’의 전문이다.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의사협회에서 채택된 이 선언문은 의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학 윤리를 서약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Oath of Hippocrates)’를 현대에 맞게 수정한 것이 바로 이 제네바 선언이다.그렇다면 히포크라테스와 의사협회는 사람들이 의사의 길로 들어서기 전 왜 이러한 선서를 낭독하게 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아마도 과거 주술이나 마법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의학을 과학의 분야로 인식시키기 위해 이 같은 선서를 낭독하게 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사람의 질병은 기도를 드리
-
역사 기타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떨어진 곳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이곳은 불편하지만 반드시 마주쳐야 할 안타까운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1637년 1월30일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이 산성의 서문으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삼전도로 향했습니다. 1636년 겨울에 발발한 병자호란 또는 병자전쟁의 결과 조선은 청에 굴복하고 조공·책봉 관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두 번의 전란, 그리고 인조의 선택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평가할 수 있는 요소로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통치 철학과 권력 의지, 그리고 민생 안정 등인데요. 광해군을 축출하고 반정을 단행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앞의 두 가지는 명확했습니다. 지난호에도 언급했듯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친명배금’을 저버린 광해군의 정치 행위는 성리학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반대로 인조와 서인은 정치적 정당성과 그에 기반한 권력 의지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이었지요. 과연 인조가 광해군보다 더 개혁적 정책을 실시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는가 하는 부분에서 평가가 갈릴 수 있습니다. 특히 그 평가의 핵심에 바로 병자호란이 있습니다. 인조는 다수의 농민이 임진왜란 이후 궁핍해지고 농경지는 황폐화된 것을 감안해 풍년이건 흉년이건 상관없이 토지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해 징수하는 영정법을 실시했습니다.그리고 광해군이 실시했던 대동법을 강원도로 확대 실시했지요. 그러나 이런 민생 안정책에도 불구하고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어야 했으며, 특히 병자호란으로 인해
-
경제 기타
은행의 기능과 은행원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한 달에 서너번 이상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은행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금융거래가 온라인을 통해 수행되면서 어떤 달에는 한 번도 은행을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 일상의 변화는 불과 10여년 만에 은행과 은행업무가 얼마나 급변했는지를 반증해 준다.은행의 업무 방식과 형태가 이처럼 급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이 하는 궁극적인 기능과 역할들은 여전하다. 은행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기능이자 필요성이 자금의 보관과 결제 기능이다. 이는 은행의 형성과정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초창기 은행은 12세기 베니스와 제노아에서 설립되었다.당시 은행들은 선박을 타고 먼 거리를 돌아다니며 상거래를 해왔던 상인들을 위해 그들의 자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하였다.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객주(客主),여각(旅閣)에서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을 비롯한 자금의 보관 업무 및 결제 업무 등을 담당한 바 있다. 그리고 곧이어 은행 역할을 해온 이들을 통해서 예금의 일정액이 구두 지시,가끔은 서면 지시를 통해서 상거래에 따라 다른 계좌로 이체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상거래를 통해 얻은 주화나 자금을 다시 가지고 다니는 데 많은 위험과 비용을 수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러한 번거로움 없이 은행에 자금을 맡겨두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믿고 거래하는 신용거래를 선호하게 된다.당시 상인들이 이러한 신용거래를 선호하게 된 또 다른 이유로는 초창기 화폐인 주화가 균일하지 못한 데에서도 기인한다. 당시 주화는 그 크기와,무게,금이나 은의 함량 등이 지역,주조시기 등에 따라 서로 달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