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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김흥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1) 에피쿠로스학파

    ■ 생각해봅시다에피쿠로스학파가 주창한 쾌락은 과도한 욕구 만족과 다르다. 이 학파는 사치스러운 향락을 통한 쾌락은 후유증을 남긴다고 했다. 영혼에 불안한 상태가 없는 평정 상태를 진정한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쾌락의 종류를 구분한 셈이다.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연안에서 오리엔트 지방까지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무너지고 동방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공동체적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들은 더 이상 도시 국가에서처럼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유대감이나 일체감을 느낄 수도 없게 되었다.헬레니즘 시대의 철학개인의 생존을 더 이상 공동체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불안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도모하려고 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인들에게도 필요했던 것은 이상적인 행복론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야 하는 생존의 윤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다. 이들은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자족을 철학적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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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아리스토텔레스(하) 인간은 정치적 동물

    《정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 저술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본성, 국가를 세우는 이유, 가족과 국민의 자격, 가정과 국가의 목적, 가장 좋은 국가를 위해 필요한 교육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간은 정치적(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실 이 명언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전제가 되는 말이다.‘정치학’에 남긴 명언‘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가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그의 명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중시되는 ‘본성적으로’라는 목적론적 개념이 빠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명언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본래 의미하고자 했던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온전한 내용을 토대로 그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맥락 가운데 사용됐다. 따라서 이 명언 중 ‘본성적으로’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그의 사상 전체를 하나로 꿰는 화살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목적론은 “모든 자연물들이 목적을 갖는다”거나 “모든 자연물들이 본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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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리스토텔레스(중) 행복론

    지난 편에서 살펴본 ‘질료’와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모든 존재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다. 사물은 형상을 가져야만 현실성을 얻으며, 형상 없는 질료는 아직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제 질료와 형상은 각각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질료란 무언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태를 뜻하며, 형상이란 질료를 통해 만들어진 현실태라는 의미를 가진다.참나무는 도토리의 목적가령 도토리는 참나무가 되기 위한 가능태이고, 참나무는 도토리의 현실태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됨으로써 도토리의 고유한 기능이 발휘된 상태가 현실태이다. 참나무는 도토리의 목적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을 이끌어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상 전체는 항상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향하는 목적을 갖고 이를 완성하고자 하는 사물들의 작용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사물을 해석하고 만물이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는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다. 이런 목적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복을 설명하고 있다.중용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그러면 인간에게 궁극적인 선과 목적은 무엇인가? 즉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은 좋음을 추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개별 행위의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런 수단과 목적의 연쇄를 계속 따라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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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아리스토텔레스(상) 현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유명한 의사였고, 어머니 또한 의사 집안 출신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적 사고를 소중히 여긴 것은 극히 당연한 일. 아닌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에 토대를 두고 모든 것을 성장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철학적인 입장을 체계화하게 되었던 것이다.생물학적 관점으로 철학18세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이 설립한 당시 ‘명문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에 들어가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된다.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는 이 문에 들어서지 못한다.” 이 말은 아카데미 정문에 쓰여진 문구이다. 여기에는 아카데미를 세운 플라톤의 생각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에서 그의 제자들이 기하학을 통하여 ‘이데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20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으로부터 철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아카데미의 정신’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학문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과 철학적 견해가 다른 아카데미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흔히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기하학과 생물학의 차이와 같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기하학의 관점을 확대하여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를 제시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현실 세계에서 불변하는 변화의 원리를 찾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세계를 각각 다른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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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플라톤(하) 도덕론

    플라톤에게 ‘도덕’은 …인간의 상실된 내적 조화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에 대하여 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을 낳았던 것이 무지와 잘못된 지식이었기 때문에 지식만이 덕을 다시 낳을 수 있는 것이다.도덕은 훌륭한 또는 올바른 삶을 위한 기준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한다. 이러한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무엇이 나에게 좋고, 나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컨대 먼저 자신의 몸과 체질에 대해 잘 알아야 무엇이 자신의 몸에 좋고, 나쁜 것인지에 관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것과 같다.자신의 몸과 체질을 알아야 한다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지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고 있는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소피스트의 영향으로 상대주의적 지식에 안주하여 무지의 잠을 자고 있었다. 여기서 아테네 사람들의 ‘등에’로서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살펴보자.“오 훌륭한 사람이여, 그대는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명성이 높은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까 하는 데에만 머리를 쓰고 또 평판이나 지위에 마음을 쓰고, 사려나 진리에 대해서 또 영혼을 가장 훌륭하게 하는 데에는 생각도 않고 염려도 하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은가?”<소크라테스의 변명>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아테네 사람들은 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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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플라톤(중) 동굴의 비유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이데아론이다. 그의 이데아론에 의하면 세계는 현상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로 구분된다. 현상의 세계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불완전한 세계로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반면 이데아의 세계는 이성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완전하고 불변하는 세계이다. 예컨대 현실에 있는 삼각형이나 아름다운 꽃들은 모두 불완전하지만, 이데아의 세계에는 완전한 삼각형의 이데아와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불완전한 세계와 완전한 세계이 세상의 모든 사물마다 그 본질인 이데아가 있으며, 그 가운데 최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플라톤도 이데아를 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 제시된 유명한 ‘동굴의 비유’이다.동굴 안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이들은 오직 맞은편 동굴 벽에 있는 그림자만 볼 수 있도록 온몸과 목이 사슬에 묶여 고정된 상태이다. 죄수들의 뒤에 있는 장벽 위에서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서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죄수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평생 벽만 보고 살아온 죄수들은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들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끌려 나간다. 그 죄수는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자들이 모두 실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는다. 동굴 밖 세상을 보고, 모닥불이 아닌 진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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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플라톤 (상)

    잘 알려진 대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그는 20세에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의 철학에 매료되었다.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평민 출신인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라톤은 아테네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플라톤도 처음에는 당시 아테네의 여느 귀족 출신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치가가 되고 싶어 했다.아테네 귀족가문 출신그러나 플라톤을 평생 철학의 길로 인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과 사형이었다. 이로 인하여 플라톤은 아테네의 현실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거둔다. 가장 지혜롭고 정의로운 사람인 소크라테스를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죽인 아테네의 민주 정치에 대하여 실망하였기 때문이다.현실 정치에서 떠난 플라톤은 철학과 교육에 관심을 두고 최초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이곳에서 그는 철학과 저술 및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계승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플라톤이 저술한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대화편이라는 표현에 나타나 있듯이 그것은 등장 인물들 간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소크라테스를 기록하다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철학함이란 대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플라톤도 철두철미하게 스승의 철학적 방법인 산파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비록 그의 대화편은 글이긴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함께 토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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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소크라테스 (하)

    소크라테스는 재판 과정에서 아테네 법관들로부터 회유를 받는다. 만약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해주겠다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음미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여기서 우리는 삶을 음미하는 것이 철학의 본질적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시사를 얻을 수 있다. 음미라는 것은 우리말에 ‘캐묻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예컨대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이 옳은가, 또는 알고 있는 지식이 진리인가 등을 끊임없이 검증해보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인 삶의 방식으로는 ‘습관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이 있다.재판정에 선 소크라테스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대개 습관적인 것들로 이뤄져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우리는 어제 산 대로 오늘을 살고, 오늘 산 대로 내일을 살 것이다. 비단 행동뿐 아니라 생각에도 습관이 스며든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살던 대로 생각하면 골치 아플 일이 없다. 이것이 매일 반복되다 보니 우리는 습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정도다. 그러면 왜 삶을 음미해야만 하는 것일까?음미되지 않는 습관적인 삶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편한 데 익숙해지면 세상과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수고로움을 점차 꺼리게 되는 게 우리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던 대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우리가 당연시하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의미를 물어봐야 한다.예컨대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라는 뮤지컬을 보면 이를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 나온다. 딸의 혼사를 얘기하던 남편 테비에가 아내 골데에게 물어본다. “당신 나 사랑해?”라고. 이 질문에 아내는 “아니 별안간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