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쾌락 추구는 오히려 고통 부른다
육체와 영혼의 평정 상태가 진정한 쾌락이다"
■ 생각해봅시다육체와 영혼의 평정 상태가 진정한 쾌락이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창한 쾌락은 과도한 욕구 만족과 다르다. 이 학파는 사치스러운 향락을 통한 쾌락은 후유증을 남긴다고 했다. 영혼에 불안한 상태가 없는 평정 상태를 진정한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쾌락의 종류를 구분한 셈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근거하여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보기에 쾌락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며, 이 쾌락이 넘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고 바람직한 삶이었다.
무분별한 욕구와 ‘쾌락의 역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은 무분별한 욕구의 충족에서 오는 쾌락이나 사치스러운 향락에서 오는 쾌락이 아니다. 이러한 쾌락들은 순간의 쾌감이 사라진 후 긴 고통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쾌락의 역설’을 불러올 뿐이다. 여기서 쾌락의 역설이란 쾌락만을 추구하다 보면 원래 목표였던 쾌락을 얻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쾌락은 어떤 종류의 쾌락인가? 어떤 쾌락은 결코 완전하게 만족하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쾌락에 계속 빠지게 된다면 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불만족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에피쿠로스는 인간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종류의 쾌락을 구별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음식의 경우처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이 있는가 하면, 성의 쾌락처럼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 아닌 욕망도 있으며 또한 사치나 인기처럼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을 구별하였다.
육체적 쾌락과 키레네학파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키레네학파는 직접적으로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강조하며 그것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위도 허용하는 입장이다. 결국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쾌락의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의 반사회성 비도덕적으로 인하여 자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무엇보다도 쾌락을 최고선과 동일시한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쾌락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의미 있는 일이라면 쾌락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그 일에 헌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