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쾌락 추구는 오히려 고통 부른다
육체와 영혼의 평정 상태가 진정한 쾌락이다"
■ 생각해봅시다육체와 영혼의 평정 상태가 진정한 쾌락이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창한 쾌락은 과도한 욕구 만족과 다르다. 이 학파는 사치스러운 향락을 통한 쾌락은 후유증을 남긴다고 했다. 영혼에 불안한 상태가 없는 평정 상태를 진정한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쾌락의 종류를 구분한 셈이다. 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연안에서 오리엔트 지방까지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무너지고 동방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시 국가의 붕괴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공동체적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들은 더 이상 도시 국가에서처럼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유대감이나 일체감을 느낄 수도 없게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개인의 생존을 더 이상 공동체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불안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도모하려고 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인들에게도 필요했던 것은 이상적인 행복론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야 하는 생존의 윤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학파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다. 이들은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자족을 철학적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근거하여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보기에 쾌락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며, 이 쾌락이 넘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고 바람직한 삶이었다.
무분별한 욕구와 ‘쾌락의 역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은 무분별한 욕구의 충족에서 오는 쾌락이나 사치스러운 향락에서 오는 쾌락이 아니다. 이러한 쾌락들은 순간의 쾌감이 사라진 후 긴 고통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쾌락의 역설’을 불러올 뿐이다. 여기서 쾌락의 역설이란 쾌락만을 추구하다 보면 원래 목표였던 쾌락을 얻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쾌락의 적극적 추구보다는 고통과 불안의 부재를, 최대한의 욕구 만족보다는 소박한 자족을 더 강조하는 쾌락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육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불안이 없는 평정상태, 즉 아타락시아에 도달하는 것이 진정한 쾌락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죽음과 신에 대해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우주의 변화나 죽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쾌락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소극적 입장을 수학의 공식으로 표현하자면 ‘쾌락=성취/욕망’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에피쿠로스는 분자에 해당하는 성취를 늘리는 게 아니라, 분모인 욕망을 줄임으로써 쾌락의 양을 늘리는 전략을 제시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쾌락은 어떤 종류의 쾌락인가? 어떤 쾌락은 결코 완전하게 만족하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쾌락에 계속 빠지게 된다면 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불만족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에피쿠로스는 인간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종류의 쾌락을 구별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음식의 경우처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이 있는가 하면, 성의 쾌락처럼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 아닌 욕망도 있으며 또한 사치나 인기처럼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을 구별하였다.
육체적 쾌락과 키레네학파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키레네학파는 직접적으로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강조하며 그것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위도 허용하는 입장이다. 결국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쾌락의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의 반사회성 비도덕적으로 인하여 자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무엇보다도 쾌락을 최고선과 동일시한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쾌락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 좋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의미 있는 일이라면 쾌락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그 일에 헌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