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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0년간 600회 가량 왜구의 침략 이어져…고려,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 결국 멸망

    통일국가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왜구의 침략은 큰 역할을 했다. 몽골과 원나라에 시달린 고려는 말기 40여 년간 왜구에게 무려 591회에 달하는 침략을 받았고 결국 멸망했다. 왜구의 침략은 이후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다 ‘임진왜란’이란 정규군의 공격으로 대체됐다.왜구는 중국 해안과 연해주 일대까지 약탈했지만, 주로 고려에 집중됐다. 왜구의 끝없는 침략과 고려의 대응왜구들은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100여 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때는 14년 동안에 378회나 쳐들어왔다. 1350년~1392년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왜노들의 침략으로 나라는 이미 섬의 물고기·소금·목축의 이익을 잃었고, 또 곡식이 나는 기름진 들판을 잃었다”고 토로했다. 또 연해의 수천리 지역에는 인가에서 연기가 끊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는 1377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려는 논의까지 했다.고려는 뒤늦게 수세적인 태도를 버렸다. 처음에는 공격 대신 회유책을 사용했다. 공민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대마도 만호에게 쌀 1000석을 주고 귀화를 원하는 왜구에게 남해안의 일부 지역을 거주지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왜구는 1374년 4월에 전선 350척을 동원해 합포(마산)로 진입했다. 왜구의 해적선은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명에서 200여 명, 소선은 40~80명 정도가 승선이 가능했다. 이에 비춰 400~500척씩 선단을 구성했으니 마치 전면전 같은 양상이었다. 이때 벌어진 해전에서 고려는 40척이 손실되고, 5000명이 전사하며 패배로 끝났다.고려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이유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현상 때문이었다. 왜구들의 거점은 주로 대마도 이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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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에 대패로 끝난 쿠빌라이칸의 일본 정벌…동원된 고려에선 친원파 득세하며 몽골풍 만연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갖춘 원나라와 고려의 대규모 연합군은 변방의 섬나라 일본 원정에서 두 번씩이나 실패하고 퇴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패인을 ‘바람(神風)’ 탓으로 몰고, 아쉬워하는 평가까지 한다. 그것이 사실일까. 전쟁의 성격을 분명하게 아는 확실한 방법은 실질적인 주체인 원나라의 정책을 살피는 것이다.첫째는 세계 제국 완성이라는 원나라의 정책과 쿠빌라이칸의 개인적인 야망이다. 칭기즈칸의 뜻을 실천한 2대 오고타이칸은 실제로 유럽 정복의 문턱까지 도달했다.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한 4대 칸인 쿠빌라이에게 이 과업은 일종의 숙명이었다. 그는 1270년에 몽골의 원향인 동방에서 고려의 항복을 받아냈고, 1273년에는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어 남송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 44년 만인 1279년에 멸망시켰다. 무인들이 지배하는 바다 건너 소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치가 작았다. 또 은, 면, 수은 등의 물품들이 있다 해도 경제적인 가치는 낮았다. 그런데도 쿠빌라이칸은 왜 대규모의 연합군을 편성해 어려운 해양전을 감수하면서 일본 열도를 공격했을까.둘째는 고려를 장악하는 원나라 정책의 문제다. 원나라가 추진한 고려 정책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전략적인 가치가 약하고, 우선 과제가 아닌 고려와의 전면전을 연기하면서 강도정부를 존속시킨 일이다. 2단계는 삼별초를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을 조직해 일본을 공격한 일이다. 고려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원치 않은 전쟁에 동원됐지만 패배로 말미암아 많은 병력이 희생됐고, 수많은 배를 건조하기 위해 국토는 황폐해졌을 것이다. 전비를 충당하느라 국가 경제력도 소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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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에 합류한 고려…900여척 전함에 1만여명 태우고 마산서 출항

    4대 황제에 오른 쿠빌라이에게 몽골제국이 부여한 최대 과제는 남송의 멸망과 동방의 완전한 정복이었다. 일본열도는 지정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었다. 일부의 견해대로 남송을 공격할 때 외교적인 배후 역할 정도였다. 쿠빌라이칸은 1226년 고려에 일본 정벌 의도를 선언하고 협조를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68년 6월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신을 억류했다.드디어 원정이 결정되고, 고려는 정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 그믐까지 대선과 소선(小船)을 합쳐 900척을 건조했고, 물품도 모두 갖췄다. 변산반도 지역과 나주 천관산 지역의 목재를 활용해 전선 300척, 빠른 공격선 300척, 급수선 300척 등 900척을 불과 4개월 반 만에 완성한 것이다. 고려의 조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고, 계속된 전쟁에도 국력과 노동력 등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음력 10월 3일. 원나라의 홀돈(忽敦·쿠둔)과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한군(蒙·漢軍) 2만5000명과 군사 8000명, 사공(梢工)·수로안내자(引海)·선원(水手) 6700명을 포함한 1만4700명의 고려군이 승선한 전함 900여 척이 마산 합포에서 출항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음력 10월 5일 대마도 남쪽에 상륙해서 고모다 해안(小茂田浜)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연합군은 이어 음력 10월 14일 늦은 오후 50여㎞ 떨어진 이끼섬에 상륙하고, 15일에 점령했다.해안에서 평지로 20여㎞ 진군하면 일본의 서경이며 군사사령부인 다자이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승리를 목전에 둔 연합군은 돌연 퇴각해서 만 안에 정박시킨 선박으로 귀환했다. 이후 새벽녘에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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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로 거점 옮긴 삼별초, 해안 방어체제 구축…환해장성·항파두리성 쌓고 여몽연합군에 대항

    제주도는 토지가 부족해서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에 불충분했고, 군수물품들을 자체 생산할 환경이 안 됐다. 반면에 육지와 거리가 멀어 정부의 예봉을 피할 수 있고,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해양력을 갖춘다면 일본 남송 유구(오키나와) 등과 교류와 무역을 하면서 자립하고, 해군력을 강화해 해양왕국을 건설할 만한 곳이었다. 마치 에게해의 크레타섬이나 이탈리아 반도 아래의 시칠리섬 같은 위상이었다. 이러한 이점들을 간파하고 이미 1270년에 점령했던 삼별초군은 신속하게 ‘환해(環海)장성’이라는 긴 해안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북제주군의 애월읍에는 궁궐과 관청 역할을 한 항파두리성을 쌓았다. 제주도 정부와의 전쟁이 무렵 원나라는 남송 공격전에서 고전하는 과정이어서 고려 내부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고려 정부 또한 삼별초와 정면대결을 할 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삼별초군은 조운 등 해양적 시스템과 해군력을 최대한 활용해 전라도와 남해안을 공격했다. 개경으로 항행하는 조운선을 탈취해 개경 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해안을 공격했고, 개경을 위협할 정도였다. 이어 경상도도 공격했고, 마산과 거제를 습격해 일본국을 정벌할 목적으로 건조 중인 군선들을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제주도를 남송 공격에 활용하는 전략을 가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고려 정부에 삼별초를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고려와 원은 총 병력 1만2000명, 군선 160척으로 여몽연합군을 편성해 1273년 4월 9일에 영산강 하구를 출항했다. 대선단은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의 곳곳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해 삼별초군과 일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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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에 승복한 고려는 강화서 개경으로 환도, 반대파는 삼별초로 집결···3년여간 항몽 전쟁

    고려는 강화라는 섬으로 피신해 당시 세계 최강 국가인 몽골에 38년간 저항했다. 섬이라는 전술적인 이점도 작용했지만, 세계 전략과 국제전이란 군사 작전의 특성을 이해한 무신정권의 판단력이 성공한 결과다. 하지만 국제질서는 변했고, 정복전쟁을 완료한 몽골 제국은 남송이라는 최후의 강적을 향해 동쪽에 군사력을 집중했다. 몽골의 협박과 회유는 100년간 권력을 무신들에 뺏긴 채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왕족과 귀족들을 돌아서게 했다. 또한 오랜 전쟁의 피해로 염전 분위기가 팽배했고, 강도정부에 대한 불신과 정부의 필요성이 혼재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병 집단으로 시작한 삼별초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으로 출발했다. 규모가 커지고, 군사력이 강해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됐다. 이후 강도정부에서 몽골에 포로가 됐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합세해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재편됐다. 이들은 무신정권과 이해관계가 깊었고, 실제로 권력의 향방에 큰 역할을 한 군사 집단이다. 몽골에 강경했던 항전파인 그들은 배중손과 노영희 등을 주축으로 승화후인 온(溫)을 임금으로 추대한 후에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전면전에 돌입했다. 전력은 열세였지만 수군 능력이 뛰어나고 해양의 메커니즘을 잘 파악한 그들은 승부수를 던졌다. 해상의 섬들을 거점으로 해군력을 이용해 연안 지역을 관리하면서, 해전을 벌이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삼별초군이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걸고 비장한 결심을 한 채 강도정부를 떠나는 광경을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기록했다.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태우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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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된 몽골의 침략, 고려는 결국 개경서 강화로 도읍을 옮기는데…

    고려는 등거리 외교와 활발한 무역을 바탕으로 분열된 중국과 공존해왔다. 하지만 몽골의 등장으로 공존과 굴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정부는 강화로 천도했다. 고려의 강화 천도 사건은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고려 정부의 정통성 문제, 우리가 외세를 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고려와 몽골의 갈등은 1225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1231년 1차 침입이 있었다. 이후 몽골은 내정을 간섭하고, 압박을 가해 무신정권은 천도를 제의했다. 실권자인 최우의 힘으로 고종과 정부는 1232년 7월 6일 강화로 천도했다. 출륙하는 1270년까지 38년 동안 몽골은 고려를 총 아홉 차례 공격했다. 강화 천도를 두고 몽골의 고압적인 태도와 과중한 경제적 보상, 군사의 파병과 군비의 조달, 그리고 정치적 간섭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명분보다 중요한 실질적 이유가 있었다.첫째, 강화도는 수전 능력이 약한 몽골의 공격을 방어하며 장기간 항전하는 데 유리하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복잡해 외부 세력이 근접하기 힘든 지형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일부만 맞을 뿐이다. 강화 수로는 폭이 매우 좁고, 밀물과 썰물을 이용할 수 있어 도강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몽골군은 절대 수전에 약하지 않다. 몽골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발하슈호·카스피해·흑해·볼가강 등을 건넜다. 그들은 최고의 기술자 군을 거느린 다국적 군대였다.둘째, 강화도는 경제적인 타격을 덜 받으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의 국가 재정은 대부분 초기에 설치한 13개 조창을 활용한 시스템으로 충당됐다. 납부된 세곡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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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강국 고려의 밑거름 된 뛰어난 조선기술…'거북선의 원조' 과선으로 여진 해적 물리져

    해양의 나라 고려는 500년 역사에서 해군력과 조선술이 발달할 수 있는 다섯 번의 계기를 맞이했고, 잘 활용해 역사의 성공을 이뤘다. 건국자인 왕건은 ‘해군대장’·‘백선장군’의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제독이었다. 전형적인 해양세력이었다. 그가 초기에 사용하던 큰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 16보요, 위에 다락을 세우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방이 16보라면 20m 정도로 대형 돛대를 몇 개 설치한 큰 함선이다. 여진 해적들의 바다로 변한 동해11세기에 들어오면서 동해는 여진 해적들의 발호로 혼란스러웠다. 고려는 국가정책으로 해적 대응책을 강구했다. 동해안의 원흥진(함경남도 정평)과 진명진(원산)에 ‘선병도부서(해군함대 기지에 해당함)’를 설치했고, 예하부대로서 진(鎭)과 수(戍)에 수군을 뒀다. 그리고 해군력의 핵심인 함선 건조에 돌입했다. 1008년에 처음으로 과선(戈船)이라는 신형군함을 75척 건조했는데, 선체의 곳곳에 창을 꽂아 근접전을 펼 때 적병들이 갑판 위로 뛰어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접근이 어렵게 만들었다. 선수에는 쇠로 뿔(충각)을 부착해 적선과 충돌시켜 선체를 깨뜨려 침몰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70여 명 정도가 승선하며, 적재용량은 1000석 정도라고 한다.고려는 1050년에 전함 23척을 이끌고 초자도의 여진 해적을 공격했다. 1107년에는 육군과 협동으로 해륙양면작전을 벌이면서 북쪽에 있는 여진 해적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동해에서 활용한 이 전투선들은 높고 거친 파도, 편북풍 계열의 바람, 원양항해구역 등 동해의 해양환경과 여진족의 배·무기·전투방식을 고려해 만든 전선이었다. 필시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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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송 갈등 속…줄다리기 외교·무역으로 성장

    고려 50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는 요나라·송나라·서하·금나라·원나라(몽골)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흥망을 거듭했다. 일본 또한 내부 갈등으로 혼란이 끝없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전쟁으로 점철된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를 성공시킨 외교정책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현재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고려의 외교정책을 중국 지역의 상황과 연관 지어 단계별로 살펴보자. 후삼국 시대에 중국 지역은 남과 북에서 15개의 나라가 70여 년 동안 명멸하는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시대(907~979년)였다. 만약 당나라가 존속했다면 통일신라의 내정에 간섭했고, 고려는 통일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운인지, 이후에도 중국은 40년 동안 분열이 계속됐다. 만주에서는 거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고, 947년에는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만리장성 남쪽의 북경 등 지역)를 차지했다.요나라는 배후가 되는 고려를 우호세력으로 만들 필요 때문에 사신을 계속 파견해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국경선을 접한 요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요나라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는 문화와 경제, 무역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황해로 인해 군사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요나라에 대항해 송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송나라는 고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려와 요의 관계를 의심해 외교의 중단이라는 파국 상태까지 이르렀다. 이때 특사 형식으로 바다를 건너가 송태조를 설득해서 7년 동안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원시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