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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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조선 국정수행·국방시스템·공동체의식 심각…일본군 전략·전술 혼란 겪을때 군대 정비하고 반격 시작
정부는 백성과 유생들을 동원해 해안 일대에 성을 구축했다. 그런데 이 정책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백성의 불만을 낳아 추진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전쟁 직전 상황에서는 평화를 앞세우는 온건파와 전쟁을 우려하는 강경파 간 갈등이 벌어지고, 권력투쟁으로 비화한다. 보통 불안과 희생을 피하려는 대중이 지지하는 온건파가 승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강경파가 상황을 수습하는 데 적극적이고, 영웅 대접을 잠시 받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온건파가 강경파를 강제로 몰아낸다. 임진왜란 때도 이런 현상이 비일비재했고, 이후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다.셋째, 지배계급인 양반의 체질과 성리학의 사상적 한계가 작용했다. 양반은 기본적으로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천시해 국방 등의 민족 모순에 둔감했고, ‘사대’란 미명하에 명나라에 의존했다. 조선 특유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양반의 이런 특권과 인식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군사력을 보유한 무반의 성장을 두려워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했다. 건국 초기를 지나면서 문반이 국방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넷째, 백성의 불만이 커지고, 민심이 이반됐다. 중종 이후가 되면서 양반사회의 모순은 심각해졌다. 신분제도가 심해지면서 고착화됐고, 사대 사화를 겪은 뒤에는 동서로 갈라져 성리학을 내걸고 권력 쟁탈전에 몰두했다. 명종 때의 ‘임꺽정의 난’, 심지어는 전쟁 도중 발생한 ‘이몽학의 난’ 등에서 나타나듯 조선의 정체는 물론 국체까지 부정하는 세력이 곳곳에서 성장했다. 임진왜란 전세의 변화 양상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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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피해 입은 조선, 승전·패전 주장 엇갈려…조선군·백성 22만여명 사망하고 농토 3분의 1 유실
임진왜란의 결과로 본 조선의 패배임진왜란이 왜 패전인가는 전쟁 발생과 진행 과정, 전투 상황, 결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다.1592년 4월 일본 규슈 북부의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대마도 병력을 선봉으로 700척에 1만8700명의 병력으로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 첨사인 정발은 전사하고 군대는 패배했다. 이어 벌어진 동래성 전투는 하루를 못 견딘 채 패배했고, 송상현은 전사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2만2000여 명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군대도 함께 상륙했다. 불가사의하지만 봉화체제의 문제로 왕궁은 4일째에야 침공 사실을 알 수 있었다.조정에서 급파한 이일은 상주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어 북방에서 맹위를 떨친 신립 장군이 기병 8000여 명 등 1만6000명의 군사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 또한 남한강변의 탄금대에 친 배수진이 실패하며 대패했다. 일본군은 3개 방면으로 나눠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당황한 선조와 사대부들은 피난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도성을 탈출했다. 임해군과 광해군 등 왕자들을 군사 모집을 목적으로 북방으로 출발시켰고, 황급하게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했다.선조 일행은 평양에 도착했고, 곧이어 한양이 불과 20일 만에 함락당했다. 무저항 상태에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한 것이다. 다시 의주로 피난 온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고자 요동 총독에게 사신을 파견했다.반면 이덕형, 이항복 등의 신하들은 선조를 말렸다. 비변사 당상인 신잡은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 여러 장수는 패배가 아니라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는 일을 두려워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다행히 선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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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물 수용후 급성장한 일본, 전쟁으로 야망 분출…수차례 침략 의도에도 조선 조정 방어준비 게을리해
명나라는 전통적으로 실크·차·도자기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효율적인 상업 유통과 세금 징수, 국방비 등 때문에 은을 대거 사용했다. 은본위제를 채택하면서 멕시코 등 아메리카와 일본의 은이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대거 유입됐다. 결국 명나라는 유럽 주도의 세계 무역망 체제로 점점 끌려들어갔다.그렇다면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인 일본은 당시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1543년 유구국으로 가려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규슈의 다네가섬(種子島)에 표류했다. 이어 1549년 예수회 신부인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鹿兒島)에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총·화약 등의 군사기술과 조선술, 항해술, 의학, 천문학, 천주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변화와 발전이 빨라졌다. 이는 또한 조총 등 군사기술 이용을 불러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서구 문물을 최대한 활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년 동안의 분열 상태를 끝내고 1590년 일본 전역을 군사적으로 통일했다. 그는 2단계 정치적인 통일, 3단계 문화적인 통일을 추진했다. 농민의 무기 소유를 금지하면서 신분제를 확고히 했고, 토지 제도를 개선했다. 동시에 다도 문화와 남만(포르투갈·에스파냐) 문화를 성행시켰다. 문인 지배·무방비 상태 조선이 타깃천한 신분 출신인 도요토미는 ‘관백’을 거쳐 ‘태합’으로 변신하며 자신의 야망을 확대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일본을 동아시아 세계에 알리고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관동을 비롯한 규슈 지역은 불완전한 지배 상태였고, 전후의 유휴 군사력 등은 내정의 안정적인 운영에 방해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군사 조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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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질서 재편 놓고 벌인 육지·해양세력의 대결…일본 에도막부·청나라 등장 등 정치적 변화 불러와
‘임진왜란’ ‘임진조국전쟁’ ‘분로쿠역(文祿役)’ ‘만력조선전쟁’ ‘조일전쟁’.이는 모두 1592년 4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7년간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임진왜란’에는 피해자 조선 정부의 시각이 담겼다. ‘임진조국전쟁’은 북한이 자체 역사관에 맞게 교정한 용어다. 분로쿠역은 일본이 당시 천황의 연호를 따라 붙인 명칭이다. ‘만력조선전쟁’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만력은 조선의 동맹군으로 참여한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 만들었고, 현대에는 ‘항왜원조’로도 사용한다. 조일전쟁이라는 용어는 근래에 우리 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다.이 전쟁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한·중·일이 삼국통일전쟁 이후 1000년 만에, 또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공격 이후 350년 만에 격돌한 동아시아 국제대전이다. 즉 국가 간 대결을 넘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을 놓고, 육지세력과 해양세력이 대규모 육지전과 해양전을 동시에 벌인, 7년간의 장기 전쟁이었다. 전쟁의 목적과 배경도 정치적인 패권 장악뿐만 아니라 무역권과 무역망, 각종 자원의 획득, 문화재 약탈, 천주교의 전파, 심지어는 조선 도공을 비롯한 노예용 포로 획득 등이었다. 조선·일본·명을 주축국으로 해 주변 여러 나라가 이해관계를 놓고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결과는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에도 막부, 청나라, 중가르 제국의 등장, 유구국의 일본화 시작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정치 질서에도 영향을 끼쳤다.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지리상의 대발견&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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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자 권력집단으로 변질하며 신분제 고착화…상공업 퇴조, 쇄국정책으로 국제 교류도 사라져
조선은 농업 위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벼농사는 식량을 제공하는 근간산업이며 낮은 산들과 들판, 길고 느린 강물이 발달한 자연환경에 적합한 산업이었다. 조세를 징수하고 백성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데도 편리했다. 조선은 농민들을 법령으로 토지에 묶어두면서 실질적으로 주거 이전의 자유를 빼앗았다. 반면 공업과 상업, 어업, 무역은 억압하고 천시했다. 산업은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고 확장할 수 있으므로 사회의 가치관과 신분제 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특정한 기술력을 갖추고, 정보를 공유하며, 부유한 데다 실용적이고 역동적인 세계관을 갖춘 전문가 집단은 중앙에서 통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산업의 발달을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그 결과 산업과 경제활동은 정체 상태에 머무르거나 후퇴해 국가의 부가 증가할 수 없었다.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화했으며 멸망 때까지 고수했다. 건국 초기부터 표방한 ‘사대교린’은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과 교류한다는 방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쇄국정책이었다. 명나라는 왜구의 발호와 내부의 정치적 문제, 성리학의 영향 등으로 해금정책을 추진했고, 일본은 쇄국이라는 기조 속에 부분적인 개항을 허용하고 왜구의 존재도 묵인하는 정책이었다. 반면 조선은 완벽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국제적인 환경과 명나라의 영향도 있었으나 내부적인 이유로 개방정책을 취하거나 여러 나라와 외교나 무역을 할 의도가 없었다. 개방을 허용하면 다른 체제의 존재와 성격을 확인할 수 있고,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수용하고 경험할 수 있어 서열 체제 속에서 누리는 양반들의 특권과 조선사회의 근간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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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 건설하려 했지만…관념적이고 원론적인 선언·정강이 새로운 문제 낳아
1592년 음력 4월 13일 황혼이 깃들 무렵, 700척에 탄 일본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란 명분을 내걸고 20여만 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4일째 아침나절에야 상륙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병력을 파견했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은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다. 그사이 도망간 정부와 군대 대신 의병들이 전국에서 항전했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승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를 이뤘다. 이어 정유재란을 거쳐 7년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은 막을 내렸다.국제정세를 보면 알 수 있었고, 일본이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한다는 정보들이 유구국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심지어 간첩으로 활동했고, 훗날 향도 역할을 한 승려 겐소는 일본이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기이하고 무능한 정부는 갑론을박 끝에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을 정사와 부사로 일본에 파견해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공격 가능성을 놓고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두 사람의 의견은 정반대였다.불가사의 한 일이다. 존재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는 정부와 군대, 관리, 지식인 그리고 백성들이었다. 왜 조선은 국방을 무시해 생존을 위협받았을까? 조선과 국민은 어째서 항상 가난했을까?조선 사회 붕괴에는 현실적인 상황 변화도 작용했지만, 국체와 정체 등의 근본적 성격이 연관된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헌법의 전문과 1조 1, 2항에 국체, 정체를 선언했다. 조선의 정체성은 주도 세력인 정도전이 1394년 태조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에 국가의 목표, 정책의 대강과 방법론 등이 담겨 있다. 여기서 ‘국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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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경험이 일본 무역발전·군사대국화 토대 이루는 사이, 명나라는 해금정책 고집·조선은 권력다툼으로 쇠락중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해 후추 등 향신료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1511년 ‘향신료의 섬’인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거쳐 1512년에는 자바섬에 진출했다. 그런데 1543년 영파로 가던 배가 표류해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때 철포(조총)가 일본에 전달됐다. 1549년에는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1553년 마카오에 진출했고, 1557년 영유권을 얻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무역망에 참여했다. 복건(푸젠), 절강(저장) 등 동남 연해지역에서 현지 상인들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으며, 특히 일본의 은을 명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이 무렵 일본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인과 선원, 선교사들이 들어가 소위 ‘남만(南蠻)문화’가 발달했다. 의술, 천문학, 조선술 등의 신기술을 비롯해 시계, 조총 등의 서양 물건, ‘빵’ ‘덴푸라’ ‘카스텔라’ 등 포르투갈에서 흘러들어간 음식 문화 등이 유행했다. 천주교가 수용돼 1582년에는 규슈 서부인 오이타(大分)현의 소년 4명이 바다를 건너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로마로 가 교황인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했다. 1584년에는 에스파냐인이 규슈 북서부의 히라도에 도착했다. 이처럼 ‘일본의 쇄국’과 ‘조선의 쇄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일본에 굴복당한 조선처럼 된다.1588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를 근절시키는 법령을 발표한다. 결국 왜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활동과 경험은 일본의 무역 발전과 군사대국화의 인적, 물적 토대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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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질하던 왜구들 국제환경에 빠르게 적응, 다국적 무역상 변신…동남아까지 활동 범위 넓혀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났고, 82년이 지난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동안 왜구 무리들은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강력한 일본군으로 변신했을까. 그리고 조선의 관리와 선비들,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전기 왜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 주민들과 왜구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온양면 정책을 폈다. 하지만 왜구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부산) 왜변, 1555년에는 을묘왜변(강진·진도·영암)을 도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가 침략한 내용이 312건이나 나온다.이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후기 왜구’들이 발호해 주로 중국 해안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1368년 건국된 명나라는 1371년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막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민간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푸젠성·저장성·광둥성 등 해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군선도 건조해 곳곳에 배치했다. 이런 해금정책은 300년 이상 존속되다가 1684년에야 폐지됐다.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적대적인 관계였던 장사성 등의 해양 세력이 성장하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였다. 또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와 달리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해양과 무역’이 아니라 ‘내륙과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왜구의 발호 때문이었다. 명 정부는 책임을 물어 1386년에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와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1392년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가 왜구를 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