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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마도주 항복 받긴 했지만 전투다운 전투 없이 철군, 미온적 대응으로 해양포기…훗날 임진왜란 참사 겪어

    조선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중간지역인 아소완 근처 니네(仁位)에 상륙했다. 하지만 급습당해 장수들을 비롯한 100여 명의 군사가 죽었다. 전투는 소강상태에 이르고, 양측은 타협을 시도했다. 조선의 입장으로는 해양작전이 곤란해지는 음력 7월 이전에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했고, 대마도주는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이종무는 정벌을 성공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7월 3일 대마도에서 철군했다. 불과 15일 동안의 작전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이뤄지지 않았고 전리품도 빈약한 대규모 해외 원정이었다. 만약 현장 사령관인 이종무가 조선을 겨누는 비수인 대마도를 점령한 뒤 일본 본토의 혼란을 이용해 영토로 편입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15일 만에 철군 후 왜구들 다시 활개결국 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충청도 해안을 공격했고, 조선은 재정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국제관계가 변화하고, 내부에서 반발이 있자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대마도가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한 영토니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대마도주는 왜인들이 거제도에 살게 하고,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형식을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시간을 벌고, 실리를 얻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부산포(동래)’와 ‘내이포(진해)’ 등을 개설했고, 대마도를 경상도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영토로 취급했다. 도주에게는 ‘도선증명서’를 발급해 무역 독점권을 줬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되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주로 이때의 상황과 몇몇 기록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후에 세종은 일본국에 통신사를 세 번 파견하고, 염포를 설치하는 등 대마도에 유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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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여년간 조선 괴롭힌 왜구 토벌하기 위해 '상왕' 태종 명령으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해적 집단에 그렇게 오랜 기간 농락당하면서도 해양력을 키우지 않은 역사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대외정책 기조로 삼았다. 명(明)나라에 사대(事大)를 취하며, 일본 등 타국과 가깝게 지낸다는 인식이다.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면 ‘현실’이라는 명목으로 굴복을 주장하고, 중국적 질서에 충실한 성리학자들로선 최고의 선택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왜구는 고려 말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지만 해를 바꿔가면서 무려 160여 년 동안 조선을 줄기차게 괴롭혔다.1393년 3월 왜구가 충청도 해안인 보령을 침공해 병선을 탈취했고, 한양 입구인 강화도 교동을 공격했다. 이듬해에는 경상도 일대를 시작으로 전라도와 서해안 곳곳을 침략했다. 이후 매해 침략했다. 1396년 8월 120척이 경상도 해안을, 10월 말에는 부산 동래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신정부는 긴장하면서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왜구의 발호에 조선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을까? 때마침 온건한 인물인 대마도주(島主)와 타협해 쌀·콩 같은 식량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한 왜구들에게는 벼슬과 성을 주고, 토지와 집도 마련해 ‘항왜(降倭)’ ‘투화왜(投化倭)’들을 만들었다. 국방력, 해군력 증강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7년에는 해안가 요충지에 진을 설치했다. 태조는 호수에서 항구로 변한 용산강에 가서 전함 진수식에 참석했고, 각 도에 함대사령관에 해당하는 수군 절제사를 임명했다. 이런 정책 덕분인지 왜구들은 한동안 발호하지 않았고, 정부도 긴장을 풀었던 것 같다. 1398년에는 수군을 감소시켰고, 이듬해에는 병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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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유지 위해 한자 고수하는 기득권자에 대응…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 만들어

    세종은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과 《월인천강지곡》 500여 곡을 비롯해 《석보상절》 같은 불교 서적에 훈민정음을 활용했다. 이후 신권(臣權)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왕들은 《훈몽자회》 《삼강행실도》 《소학》 《천자문》과 각종 의서 편찬에 훈민정음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기적의 문자’ 훈민정음은 공문서 등 국가의 공적 역할은 하지 못하고, ‘언문’ ‘암글’ ‘중글’ 등의 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왜 450여 년 만인 1894~1896년 갑오개혁 때야 비로소 나라글로 인정받았을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 조선 시대에 ‘문자’는 필수적인 기호가 아니었다. 우리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생태환경과 유별난 역사, 생물학적 특성 탓에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매우 감성적이었고,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에 서툴렀으며, 사회구조의 필요성도 약했다. 또한 조선은 농업 중심의 씨족공동체 사회였다. 따라서 상업·산업이 발달한 사회보다 거래와 소통이 덜 필요했고, 효율적이고 계량적인 문자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둘째, 한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성리학자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고, 경제적으로 유일한 재화이자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도덕과 학문·예술을 만들고 보급하며 감독하는 고위 관리 또는 출세를 고대하는 예비군이었다. 더구나 사대교린 정책을 선택했고, 자의식도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들은 끝까지 한자와 한문을 고집했다. 어려운 한자 … 해석에도 유추 심해한자는 ‘동이인&r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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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통하지 않으니…애민군주 세종, 독창성·탁월함 갖춘 한글 만들다

    한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글자다. 동시에 인류의 지적 성장, 향상된 사고능력, 과학의 발전, 진보된 사상(인간주의)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특히 개인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기간에 창작한 글자란 점에서 주목받는다. ‘표음문자’여서 학습하기 쉽고 사용이 편리하다. 논리적인 음운체계 덕분에 사용자가 수리적 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구조와 제정 방식에 관심이 많다.필자는 역사학자로서 한글을 창조한 목적이 궁금하다. 세종은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을 소유한 최고의 권력자였다. 국가경영자인 동시에 뛰어난 학자였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에 그의 사상과 구현 방식(논리)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홍익인간 사상과 ‘3의 논리’이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표현됐다.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에는 목적을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했다. 당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사정을 ‘어엿비’ 여긴 ‘어린 백성(愚民)’은 그리스나 로마의 특수한 시민이나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등장한 신사(부르주아지)가 아니었다.세종의 정책 근간은 백성의 생활 편의와 풍족함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농사에 도움을 준 점, 조세를 감면해 ‘공평화’를 도모한 점에서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의창, 혜민서, 활인서 등을 설치해 백성의 굶주림과 질병을 치료했다. 당시 이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는 법까지 제정했다. 이런 세종은 모든 백성이 자기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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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간 충돌·구성원 간 갈등이 판치는 시대…단군신화는 조화·합일 통한 상생 사상 추구

    일연은 《삼국유사》 첫머리에 ‘고조선(왕검조선)’ 조항을 세 부분으로 구성해 기록했다. 1부와 3부는 역사 서술의 형태고, 2부는 ‘석유환인(또는 석유환국) 호왈 단군왕검’인데, 24개의 신화소를 이용해 치밀하게 논리를 구성했다. 필자는 이 신화에 담긴 논리와 사상을 분석해서 세 가지로 정리했다.첫째, 천손의 후손이면서 농경문화를 선택한 집단이라는 자의식을 선언했다. 원조선의 성립과 우리 문화의 근간에 큰 역할을 한 이주민 집단은 서북방 초원에서 왔고, 하늘과 해를 신령스럽게 여겼다. 환웅과 임금인 환인의 ‘桓(환)’은 밝다·크다·하나다·빛나다 등의 뜻을 가졌고, 한국·한글·칸(王) 등과 동일하다. 그가 내린 태백산 꼭대기(太伯山頂) 당나무(神壇樹) 아래의 신시(神市)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장 성스러운 원형이다. 따라서 이런 천손강림신화는 부여·고구려(백제)·가야·신라·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계승됐다.또 신화 속 웅(熊)은 지금도 곰을 숭배하는 동시베리아와 동북만주의 수렵삼림문화, 토지와 달을 숭배하는 남만주와 한반도의 농경문화라는 두 가지 논리축이 겹쳐 완성된 지모신(地母神)의 상징이다. 때문에 ‘웅’은 동물이 아니라 감·검·금·고마·개마 등과 마찬가지로 무당이나 신, 왕 등을 의미하는 알타이어다. 신라 왕인 이사금과 금성(경주), 고구려의 일본식 명칭인 ‘고마’, 백두산보다 먼저 고구려 때 사용된 개마산·개마대산 등의 명칭, 백제 수도인 곰나루(熊津) 등은 이와 연관이 깊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은 하늘과 땅의 결합으로 탄생한 신령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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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대로 전해져 온 '한민족 삶의 지침' 단군신화…인본주의·생명주의 품은 가치 높은 유산이죠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집단이 자기 사상이나 고유종교가 희미한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는 생활문화에서 전통의 흔적이 잘 안 보이는 현상은 어찌 된 일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의식이 부족하고, 창조보다 모방을 선호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자유의지가 약해지고, 남에게 습관적으로 구속당하는 것이 역사인데 말이다.문화가 풍성하고 뛰어나려면 적극적인 교류와 능동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특히 21세기는 시공의 한계가 희미해지고, 하나의 ‘장(field)’에서 문화의 보편성이 급팽창되는 추세여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하지만 교류와 수용에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첫째, 교류의 방식이다. 충돌과 갈등(새뮤얼 헌팅턴)인가, 협력과 공존(표트르 크로포트킨)인가? 문명의 발생 이후 끝없는 논쟁거리다. 그런데 현재도 그렇지만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 주인과 종속이라는 나쁜 관계가 더 많았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다른 집단과 만나는 방식은 명분과 이상이 아니라 현실과 힘을 갖추고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공평하다. 그렇다면 생활의 편의나 소수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양적 팽창보다는 삶의 본질과 다수의 이익을 구현하는 질적 성숙이 중요하다.둘째, 주체와 객체의 구분과 역할이 분명해야 한다. 이는 일부의 오해처럼 자존심이나 명분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수용의 주체인 토대의 문화, 사람 등은 양적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현실의 문제점과 해결 방법을 간파하는 경험과 능력도 더 많다. 그런데 현실과 상황을 잘 모르는 외부 세력이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 심지어는 문화력까지 동원해 교류를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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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유복한 생활'임을 안 세종…농업 기술개발에 힘쓰고 세금 공평하게 내게 했죠

    세종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장비를 만들고, 무기를 개량했다. 1448년 신기전이 발명됐는데, 한 번에 15발씩 연속으로 100발을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가 1000m 이상인 신병기였다. 수레 등으로 운반이 가능한 조립식 대포(총통 완구)를 만들고 화포 주조와 화약 사용 방법, 규격 등을 그린 《총통등록》도 발간했다. 해전을 위해 일본인과 유구인의 도움을 받아 개선한 선박을 한강에서 시험운행했다.‘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고 했던 태종의 평가처럼 뛰어난 전제군주라고 볼 수 있지만, 세종은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대지주인 신하들 반대 무릅쓰고 조세공평화세종은 백성들의 생활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착취경제가 아닌, 생산경제의 도입을 시도했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유복한 생활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인본주의자였다. 농법 개량에 노력을 기울여 1429년에는 농사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농사직설》을 편찬했다.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록 통치기술로도 활용했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강했다. 1433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이듬해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1442년부터는 측우기를 사용, 전국의 강수량을 골고루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줬다.그는 조세를 감면하는 정책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국의 토지를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비옥도를 검사해 6등급(전분육등법)으로 나눴고 20년마다 재측량했다. 이렇게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대지주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7년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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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역사에서 천재가 등장할 때 사회는 급변하고, 동시대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족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의 천재’란 어떤 성격과 능력을 갖췄을까. 이들은 머리가 좋고,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과 현상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다. 더불어 모든 사람을 아끼고, 시대와 자연까지 돌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한다. 나아가 타인과 조직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단군, 고주몽, 김춘추, 왕건, 이순신 등은 우리 역사의 천재들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세종대왕 이도(李)는 1397년 태어나 1418년 6월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선택으로 두 달 만에 4대 임금이 됐다. 피비린내와 풋내를 벗지 못했던 조선은 세종대왕이 즉위한 1418년부터 과로와 당뇨병으로 운명한 1450년까지 32년 동안 질적으로 변신했다. 고려를 없앤 명분과 조선을 존속시킬 힘을 동시에 얻었다.불가사의하다. 그의 업적을 보면 한 인물이, 한 시대에 이렇게 의미 깊고 다양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다. 그를 역사의 천재로 만들었을 시대 상황, 정책에 참여한 인물, 업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본다. 세종대왕을 정치인의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 젊은 임금은 야망과 집권 의지를 가진 건국세력을 견제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정원을 강화하고, 도승지(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실력이 뛰어난 학자들로 신권력집단을 양성했다.둘째, 성리학을 활용해 ‘성(性)’과 ‘법’, ‘률’로 합리적인 국가 체제의 토대를 완성했다. 귀족, 무신, 권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