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조선 전기의 왜구발호와 대마도 정벌 ( 上 )

1393년 3월 왜구가 충청도 해안인 보령을 침공해 병선을 탈취했고, 한양 입구인 강화도 교동을 공격했다. 이듬해에는 경상도 일대를 시작으로 전라도와 서해안 곳곳을 침략했다. 이후 매해 침략했다. 1396년 8월 120척이 경상도 해안을, 10월 말에는 부산 동래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신정부는 긴장하면서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

그런데 1418년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대마도주가 죽고, 해적 두목이 실권을 장악한 데다 기근까지 발생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왜구들은 다시 1419년 5월 50척의 해적선으로 충청도 비인에 나타났고, 해주의 연평곶을 공격했다. 백성들은 약탈과 살육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온건과 회유로 일관한 조선의 미봉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위기의식이 심각해지고 신정부의 정통성과 신뢰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대마도 정벌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일부 세력의 반대가 있었고, 조선 내부적으로도 권력투쟁을 끝낸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지 몇 달 안 된 불안정한 시기였다. 또한 자칫하면 본토의 일본군과 충돌할 수 있고, 명나라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상왕인 태종은 결국 대마도 공격을 선택했다. 대마도 정벌 대원정

함대는 출항 직후에 맞바람을 맞아 회군했다가 다시 19일 미명에 출항해 20일 정오 무렵 선발대가 대마도 해안에 도착했다. 조선군은 129척의 배를 소각했고, 1939채의 집을 불태웠다. 하지만 왜구는 104명을 죽였을 뿐이고, 21명을 포로로 잡은 미미한 전과였다. 왜구들은 대마도의 전략적인 환경과 전투 상황을 파악하고, 배를 만과 포구 등에 숨긴 채 산속에 숨어 조선군의 동향을 관찰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북섬과 남섬이 만나는 잘록한 지점인 선월(船越: 배를 육지 위로 끌어서 반대편 바다로 넘기는 지점)에 목책을 설치했다. 해당 지점은 1904년 러·일 전쟁을 벌일 당시 일본이 운하를 뚫어 두 섬으로 만들면서 만관교를 세운 곳이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60여년간 조선 괴롭힌 왜구 토벌하기 위해 '상왕' 태종 명령으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https://img.hankyung.com/photo/202204/01.29802639.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