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조선 전기의 왜구발호와 대마도 정벌 ( 上 )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해적 집단에 그렇게 오랜 기간 농락당하면서도 해양력을 키우지 않은 역사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대외정책 기조로 삼았다. 명(明)나라에 사대(事大)를 취하며, 일본 등 타국과 가깝게 지낸다는 인식이다.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면 ‘현실’이라는 명목으로 굴복을 주장하고, 중국적 질서에 충실한 성리학자들로선 최고의 선택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왜구는 고려 말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지만 해를 바꿔가면서 무려 160여 년 동안 조선을 줄기차게 괴롭혔다.1393년 3월 왜구가 충청도 해안인 보령을 침공해 병선을 탈취했고, 한양 입구인 강화도 교동을 공격했다. 이듬해에는 경상도 일대를 시작으로 전라도와 서해안 곳곳을 침략했다. 이후 매해 침략했다. 1396년 8월 120척이 경상도 해안을, 10월 말에는 부산 동래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신정부는 긴장하면서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 왜구의 발호에 조선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을까? 때마침 온건한 인물인 대마도주(島主)와 타협해 쌀·콩 같은 식량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한 왜구들에게는 벼슬과 성을 주고, 토지와 집도 마련해 ‘항왜(降倭)’ ‘투화왜(投化倭)’들을 만들었다. 국방력, 해군력 증강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7년에는 해안가 요충지에 진을 설치했다. 태조는 호수에서 항구로 변한 용산강에 가서 전함 진수식에 참석했고, 각 도에 함대사령관에 해당하는 수군 절제사를 임명했다. 이런 정책 덕분인지 왜구들은 한동안 발호하지 않았고, 정부도 긴장을 풀었던 것 같다. 1398년에는 수군을 감소시켰고, 이듬해에는 병선을 조운선이나 농사에 활용하도록 조치했다. 충청도에서만 병선을 220척이나 없앴다. 그래도 태종은 즉위한 뒤 전함 건조에 힘써 초기 428척에서 1408년에는 613척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1418년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대마도주가 죽고, 해적 두목이 실권을 장악한 데다 기근까지 발생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왜구들은 다시 1419년 5월 50척의 해적선으로 충청도 비인에 나타났고, 해주의 연평곶을 공격했다. 백성들은 약탈과 살육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온건과 회유로 일관한 조선의 미봉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위기의식이 심각해지고 신정부의 정통성과 신뢰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대마도 정벌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일부 세력의 반대가 있었고, 조선 내부적으로도 권력투쟁을 끝낸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지 몇 달 안 된 불안정한 시기였다. 또한 자칫하면 본토의 일본군과 충돌할 수 있고, 명나라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상왕인 태종은 결국 대마도 공격을 선택했다. 대마도 정벌 대원정 원정군 사령관 격인 삼군도체찰사에 임명된 이종무(李從茂)는 각 도의 병선을 수리하고 병사들을 소집하면서 전쟁 준비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한편 공격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대마도에 사신을 파견해 왜구들을 잡아 보내라고 했다. 드디어 1419년 6월 17일. 227척의 전선과 1만7285명의 병사가 거제도 해안을 출항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대규모 해양원정이었다. 거제도는 선사시대부터 한·일 간 항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함대는 출항 직후에 맞바람을 맞아 회군했다가 다시 19일 미명에 출항해 20일 정오 무렵 선발대가 대마도 해안에 도착했다. 조선군은 129척의 배를 소각했고, 1939채의 집을 불태웠다. 하지만 왜구는 104명을 죽였을 뿐이고, 21명을 포로로 잡은 미미한 전과였다. 왜구들은 대마도의 전략적인 환경과 전투 상황을 파악하고, 배를 만과 포구 등에 숨긴 채 산속에 숨어 조선군의 동향을 관찰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북섬과 남섬이 만나는 잘록한 지점인 선월(船越: 배를 육지 위로 끌어서 반대편 바다로 넘기는 지점)에 목책을 설치했다. 해당 지점은 1904년 러·일 전쟁을 벌일 당시 일본이 운하를 뚫어 두 섬으로 만들면서 만관교를 세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