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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AI·양자컴 수출통제 확산…한국의 선택은
잠재 적국으로의 첨단 기술·자원 유출을 막는 수출통제가 신(新)냉전시대 도래로 확산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 역량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30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우리 정부의 수출 통제 담당 조직인 산업부 무역안보정책관(국)의 인력은 34명에 불과하다.-2024년 10월 1일 자 한국경제신문-미·중 패권 경쟁 등 신냉전이 본격화하면서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수출 통제를 둘러싸고 마치 ‘전쟁’과도 같은 국가 간 수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대량살상무기 하면 흔히 핵폭탄이나 생화학무기가 떠오르지만 2024년 현재 수출 통제의 핵심은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양자 컴퓨터 같은 최첨단 기술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기 자체를 만들기 위한 기술을 넘어 경쟁국의 경제적 잠재력 자체를 꺾는 것이 곧 ‘안보’라는 생각이 깔린 것이지요.이 같은 국제질서의 변화는 수출로 먹고사는, 특히 반도체가 주력 수출품인 한국으로선 반가운 소식이 아닙니다. 그간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의미하는 ‘안미경중’ 전략이 더는 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최근 급격히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는 수출 통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수출 통제는 국가가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국의 수출 흐름에 제약을 가하는 수출규제 정책의 하나입니다. 안보를 목적으로 특정 품목, 기술의 수출을 금지 및 제한하는 조치로 경제보다 안보에 방점이 찍힌 개념이지요.수출 통제는 그 자체로 냉전의 산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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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읽는 세상
'세계 수출 5위' 한일전이 시작됐다
올해 1분기 한국 수출이 달러화 환산 기준으로 일본의 97%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자동차, 기계 등 주력 제품의 수출 호조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올 들어 반도체 수출마저 완연한 회복세를 보인 결과다. 반도체 수출에 가속도가 붙으면 올해 한국은 연간 7000억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하며 처음으로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수출 5강에 진입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를 지키려는 일본의 반격도 거센 상황이라 양국의 수출 5위 쟁탈전은 올해 내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28일 한국경제신문이 산업통상자원부의 수출입 동향 및 일본 재무성의 무역통계 등을 분석한 결과 한국의 올 1분기 수출액은 1638억 달러(약 227조원)로, 같은 기간 일본 수출액 1683억 달러(약 233조원)의 97.3%에 달했다. 양국의 1분기 매달 평균 원·달러 환율 및 엔·달러 환율을 적용한 수치다.한국과 일본의 수출 격차가 3% 이내로 좁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2년 한국이 6836억달러 수출을 달성해 일본(7469억 달러)의 91.5%까지 쫓아간 게 기존 최소 격차였다. 하지만 지난해 반도체 수출이 악화하면서 한국 수출(6322억 달러)은 다시 일본(7173억 달러)의 88.1% 수준으로 밀렸다.경제 규모가 40%에 불과한 한국의 수출이 올해 1분기 일본을 3% 이내로 추격할 수 있었던 요인을 통상 전문가들은 주력 수출 품목의 차이에서 찾았다. 반도체와 전자 시장 주도권을 한국에 내준 이후 일본의 수출은 ‘자동차 1강’ 구도로 변했다. 지난해 일본 전체 수출에서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17.1%에 달했다. 두 번째 수출 품목인 반도체·전자부품의 비중은 5.4%에 불과했다. 일본이 자동차라는 강력하지만 하나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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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오군란으로 청·일본 역학관계 복잡해지며 조선의 개혁 좌절되고 청·일 전쟁 명분 제공해
집권 세력은 위기의식을 가졌지만 멸망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예상하지 않은 것 같다. 13년 정도 일찍 외세에 개방당한 일본은 개혁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고, 국제관계도 그레이트 게임의 주변부로 움직이면서 변화무쌍했다. 그 때문에 조선에 반전의 시간과 기회는 있었고, 실제로 36년 뒤에야 일본에 합병당했다.명성황후 정권의 외교정책과 외교관 등 외국인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개혁과 구국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판단된다. 1876년에 1차 수신사를 파견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충격받아 <일동기유(日東記游)>를 써 정부에 보고했다. 1880년 6월에는 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을 파견했고, 12월에는 정부 조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외교·내정·군정 등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이어 1881년 4월에는 ‘조사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신사유람단’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이때 62명은 74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분야를 치밀하게 조사한 뒤 100여 책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중간인 5월에는 장교를 양성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9월에는 ‘영선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해 청나라의 양해하에 군수 공장 등에서 화약과 탄약 제조법을 비롯한 군사 분야의 기술과 외국어를 배우게 했다.한편 자주외교를 표방하면서 청나라에는 책봉 체제를 없애고 근대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으며, 일본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 조항을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 국교 수립을 추진하고, 김홍집이 가져와 개혁과 외교정책의 모델로 삼은 <조선책략>을 보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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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사절단, 지식·기술 배우려 하지 않고 외면…청나라 다녀온 북학파는 개혁과 실학 주체 돼
외국에 나가도록 승인받은 사람들은 국가가 파견한 관리와 상인, 수행원이었다.첫째는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이었다. 300~5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이 12차에 걸쳐 파견됐는데, 대마도에서 도쿄까지 왕복하는 데 거의 1년이나 걸렸다. 그들이 견문하고 체험한 18세기 일본은 자체 발전정책과 난학(네덜란드학)의 수입을 통해 새로운 지식, 기술 등을 보급받아 국력이 팽창했다. 김세렴·신유한·조엄 등 몇몇 인물이 일본 사회를 분야별로 분석하고 기록하며 난학의 우수성도 언급했다. 이들은 고구마를 들여오고, 수차 기술 등도 전달했지만 조선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개혁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통신사를 파견한 목적 자체가 학습과 수용의 기회가 아니라 시혜와 과시, 일본의 군사적인 도발을 막으려는 회유였다. 따라서 그들의 자세는 자랑과 오만, 일본에 대한 멸시가 많았고, 보고서를 제출해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반면 청나라에 공식 파견된 연행사는 달랐다. ‘북학파’라는 세력으로, 조선 후기 사회 개혁과 실학의 초기 주체로 변신했다. 이들은 일단 규모가 컸다. 1회에 30명의 정식 인원과 수행원을 포함해 200~300명 정도가 파견됐다. 1637년부터 1894년까지 250여 년간 507회였으니 총인원을 고려하면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이다.압록강을 건너면서 박작성·구련성 등을 보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를 비롯한 젊은 선비들의 눈길과 가슴을 떠올린다. 불안한 조선의 현실을 떨치지 못한 채 사명의식과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봉금지대를 통과해 경계선인 봉황성(鳳凰城)에 닿았다. 이어 요양·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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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8세기 조선 사회구조 개혁 필요한 상황에 처해…실용적인 사상·백성 위한 정책 구하려는 움직임
어느 시대에나 실패와 생명의 위협을 예견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식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1765년 35세의 홍대용은 연행사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에서 신세계를 경험한 뒤 신기하고 유용한 지식을 갖고 귀환했다. 이어 15년 후인 1780년 초여름에는 그의 영향을 받은 박지원이 늦은 나이인 43세의 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단동시 외곽인 구련성에 닿자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이라고 잘못 인식한다. 이어 봉금지대를 통과해 청나라의 경계선을 넘어 봉황성에 이르자 고구려를 회고한다. 이미 역사를 공부하고 온 그는 성리학자들을 질타하고, <자치통감>까지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을 전개한다. 평양과 패수의 위치, 지명의 이동, 낙랑문제 등 예민한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는 북경을 거쳐 황제의 여름궁정인 열하까지 방문하고 다섯 달 만에 귀국했다. 그는 자료를 수집해 3년에 걸쳐 무려 26권에 달하는 기행문 <연암일기>를 썼다. 그가 죽을 때까지 수정 보완한 그 책은 필사본 때부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궁금하다.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까?닫힌 나라에 살던 조선사람에게 외국이면서 침략국이고 대국인 청나라의 문물과 실상은 신기함과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더구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문체로 쓰인 <호질전> <허생전> 등은 현실을 뼈아프게 풍자했으니 대리만족을 줬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청나라와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상호 비교하고, 조선에 필수적인 서양 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는 현실을 파악하는 학습서와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한 지침서 역할을 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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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이 간도 영유권 청나라에 넘기는 대신 관리권 확보해 만주 점령·통치 전략 세워
‘간도 영유권 갈등’은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부터 1885년, 1887년의 감계회담과 간도협약을 거쳐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 간 매우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간도협약의 문제성을 인식하고 해결하려면 조약의 정당성과 실효성 여부를 검증하고 그 내용과 배경을 국제질서의 재편이란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과 구질서의 청산을 두고 벌인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이어 사할린 지역과 조선의 지배권, 만주의 선점을 걸고 러시아와 충돌했다. 독도를 차지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다. 이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이던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대한제국과는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7년에는 프랑스와 ‘불·일협약’을 맺고, 러시아와는 ‘제1차 러·일협약’을 맺어 러시아가 구축한 철도·항만·탄광 등 만주의 이익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그런데 1906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 통감부에 간도 지역에 사는 조선인을 마적 등으로부터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8월 한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고 육군중좌를 소장으로 파견해 원대한 목표와 행정구역 설정 등 치밀한 계획하에 간도협약을 주도했다.연길청까지 설치한 청나라는 대군을 파견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두 나라는 1909년 1월 협상을 시작해 9월 4일 ‘간도협약(圖們江中韓界務條款)’을 맺었다. 전문 7조로 구성된 협약의 제1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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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청과 2차례 감계회담에서 영유권 주장 '충돌'…일본 개입으로 간도협약 맺어진 후 진척 없어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뒤 발언권이 다시 강해졌고, 1885년에는 간도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의 농가를 소각하고 무력으로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토문감계(土門勘界), 즉 감계회담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9월부터 11월까지 네 번에 걸쳐 제1차 감계회담을 열었다.조선은 문제의 핵심인 ‘토문’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사실의 확인을 요구했고, 반면 청나라는 정계비를 무시한 채 토문(土門)을 두만(圖們)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중하와 청나라의 가항계는 공동으로 정계비와 주변을 조사해 ‘목책’ ‘돌무지(석퇴)’ ‘흙무지(토퇴)’ ‘건천’과 ‘토문’ 등을 발견했으며,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오도백하인 사실을 확인했으나 담판은 결렬됐다. 1948년 7월 이곳을 답사한 북한의 황산철은 1957년 발표한 글에서 이곳에 돌각담이 106개 있었으며, 길이는 5391m라고 썼다.1887년 4월에는 제2차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나라는 석을수(石乙水)를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간도와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중하는 지도 등 여러 자료와 증거를 내놓고 토문과 두만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강희제가 국책사업으로 만든 J B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는 두 나라의 경계선을 두 강의 북쪽에 그렸고, 청나라도 이 사실을 인지했다. 물론 조선도 일부의 예외를 빼놓고는 같은 인식을 가졌던 증거들이 지도를 비롯해 연행록 등에 많다.또 간도와 연관해 영조 7년과 22년(1746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생했다. 청나라에서 애하(河)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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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청 강희제, 민족간 충돌 빌미 백두산 경계선 확정, 두만과 토문 동일성 여부 논쟁…최종 결론 못내려
강희제는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서 조선인들과 여진인 한인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빌미로 백두산 일대를 측량하고, 경계선을 확정하는 2차 작업에 착수했다. 드디어 1712년 3월 강희제의 명을 받은 오라(길림) 총관인 목극동은 조선 관원들의 참여를 막은 채 백두산 대택(천지)에 올라갔다. 내려온 그는 주위를 유심히 관찰한 뒤 천지(대택)의 동남쪽 4㎞ 지점(해발 2150m)을 지정하고 높이 70.6㎝, 폭 54.6㎝의 돌비를 세워 82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비는 1929년(1931년 7월 설) 사라지고, 현재는 주변에 표지석인 돌무더기만 일부 남아 있다.(이한기 <한국의 영토>) 그런데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나왔다. 19세기 후반부터 간도 분쟁을 거쳐 최근에는 간도 영유권 문제로 비화된 상태다.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최종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첫째, 토문(土門)과 두만(豆滿), 투먼(圖們)은 위치, 지형, 물길, 발음 등이 분명히 다르다. 목극등(穆克登)은 지형을 설명하면서 토문(강)의 물이 끊긴 곳(건천)을 조선에서 표시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두만강 선을 고수한다는 조선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박권은 두만강이 그곳이 아니라며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목극등은 ‘토문’이 분명하다며 설명까지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목극등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청나라에는 레지가 정확하게 측량한 뒤 조선의 지도까지 참고해 만든 만주지도가 이미 있었다(1709년 12월 완성). 그렇다면 황제의 명을 받고(奉旨) 국가사업을 실행하는 목극등이 이 지도를 참조했거나 소지했음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