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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아시아 바다 누비며 무역…유럽·남미 순방도, 통신사 정세파악 못해 1875년 일본 군함에 무릎

    조선 도공인 이삼평이 가마를 연 아리다(有田) 자기는 매우 유명해 유럽에서 주문자 생산이 많았고, 독일 등에는 일본 도자기 연구소들이 설립돼 도자기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도자기와 더불어 전파된 전통 그림인 ‘부세화(우키요에)’는 유럽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인상파가 성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모네, 마네, 고흐 등은 일본 문화에 심취해 작품에 많이 반영했다.일본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중국의 해안가 도시들,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샴(태국), 믈라카 해협, 자바섬(자카르타), 루손(마닐라), 타이완 등에 마을을 만들었고, 상관을 설치하면서 무역선을 파견했다. 철, 일본도, 은, 구리, 심지어 서양식을 모방해 제작한 총까지 수출했다. 일부 지역에는 왜구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조선 포로도 있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네덜란드와 청나라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 살던 아이누(하이)인들, 남쪽의 유구(오키나와 열도)를 지나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벌였고,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대무역망’과도 연결됐다.일본이 이렇게 상업 발달과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데는 내부의 발전도 있었지만 막부의 해양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지만, 해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특정 상인들에게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주인장(朱印狀)을 발부했는데, 이 증서를 소지한 ‘주인선’은 일본 배를 근간으로 중국의 장크 스타일에 서양 범선의 특징을 혼합해 만들었다. 조선을 침공했던 선봉장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는 1604년 약 550t급의 주인선을 건조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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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신사 9차례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막부, 해양력 강화…경제수도 오사카 인구 40만명

    조선은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란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다.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이라고 부르며 성리학적 지식을 뽐내던 조선 통신사들이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했다.왜인이라고 경멸하며 눈길을 돌렸던 배타적인 통신사들도 놀라면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수도였던 오사카는 인구가 4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해 물자가 풍부하고, 많은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도시였다. 도시는 정비가 잘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도로가 숫돌처럼 반반했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췄다. 강과 운하에는 ‘무지개 다리’들이 걸려 있었고, 수많은 선박이 오갔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거리와 수입품을 전시해놓은 시장들, 목욕의 풍습과 변소의 청결함도 경이로운 눈초리로 기록했다.에도(1868년 이후 동경)는 막부의 쇼군이 거주했던 정치수도였다. 고구려 유민과 신라인들이 개척한 동경만 지역의 작은 어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업과 무역 등을 염두에 두고 건설한 해양도시였다. 발전을 거듭하더니 18세기 초에는 상하수도 설비 등 각종 인프라가 구축됐고, 인구 100만여 명의 세계적 도시로 변모했다. 반면 20세기 초 한양 인구는 25만 명 정도였다.일본은 발달한 수차를 사용했고, 수리시설을 완벽하게 갖춰 따뜻한 기후를 활용해 삼모작을 하고 있었다. 수산업이 발달해 전 해역에서 어로활동이 활발했다. 혼슈 북쪽 아키다, 아모모리 등의 해역에서 잡은 ‘연어’와 ‘다시마’ 등을 실은 상선들이 조선통신사선들이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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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침략 막기 위해 일본을 살피고 배우기보다 멸시…정약용 등은 통신사 거만한 행적과 과시행태 비판

    조선통신사 행사는 두 나라의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약점을 파악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조선이 재침을 방어하고 역습의 기회를 모색한다면, 내정을 샅샅이 탐지하고 해양력을 파악하며 복잡한 해로망까지도 탐지할 기회였다. 물론 ‘시호(승냥이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듯한 불안감, 종묘사직과 능묘까지 훼손당한 적개심과 오기 등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과 무력감 때문에 파괴된 나라와 피해 입은 백성들에 대한 도리를 떠올려야 했다.일본은 멸시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 학습의 대상이었지만 정치인이면서 학자였던 조선통신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이 심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적인 상태에서도 일본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다.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지칭하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불렀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스러운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뒤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일본의 기술 능력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본 정약용은 통신사들의 거만한 행적과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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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간의 임진왜란 후 조선·일본·명나라 급변기 맞아, 강화 분위기 고조…1811년까지 통신사 9차례 보내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조선 정부와 대마도 사이에는 강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약탈전쟁이 실패한 탓에 무사와 백성들의 염전(厭戰) 분위기가 높아졌고, 토지의 황폐화로 사회의 토대가 흔들렸다. 참전 세력과 치열한 내전 끝에 승리한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신정권을 안정시키고, 외국의 인정을 받아 정통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신속한 전후처리를 위해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는 일이 필수적이었다.조선도 무너진 사회 체제와 왕조의 권위,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또한 명나라는 멸망 직전이었고,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압박이 시작됐다. 이미 어선들이 서해 연안을 침범하고, 청나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조선 침공의 위기가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 국가의 생존과 정권의 유지를 위해 배후의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컸다.두 나라는 실리와 형식을 놓고 조정한 끝에 조선이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해 일부 포로를 송환했고,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라는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일본은 쇼군이 새로 등장하면 조선에 고보(통보)하는 사신을 보냈고, 조선 정부는 답방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열두 번이다. 미묘한 정치 행위였지만, 규모가 매우 크고 동아시아 질서에서 파급력이 큰 행사였다. 특히 일본에선 전 국가적인 행사로 꼽혔다. 또한 대마도에는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따로 ‘문위행(問慰行)’이라는 소규모 사절단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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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으로 최대 10만명 안팎의 백성이 포로가 돼…마카오·인도·이탈리아·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가

    정권과 나라는 붕괴해도 괜찮다. 이민족, 다른 국가에 지배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성은 죽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살아야 새 세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임진왜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결과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정권이 교체됐다. 명나라는 파병 목적을 이룬 대신 멸망이 앞당겨졌다. 만주의 여진족은 어부지리를 얻어 청 제국을 건설했다.침략을 받아 전장이던 조선은 승전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의병장들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끌려간 포로를 내버렸다. 교토 시내의 ‘미미쓰카(耳塚)’라는 크지 않은 무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베어온 조선인의 귀 5만 명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포로는 적게는 2만~3만, 많게는 10만 명이 넘고, 그 가운데 7500명 정도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국에 귀환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고, 책임져야 할 조선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전쟁은 고도의 정치행위, 경제행위며 또한 문화행위다. 그 때문에 사람의 약탈이 있었고, 노예무역이 병행됐다. 일본군은 정치적인 영토 외에 자원과 문화재 약탈,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군대 체재까지 개편했다. 그 결과 학자, 의원, 도공 등의 기술자와 농민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 적선에 실린 채로 대한해협을 건너 적지에 내팽개쳐진 조선 포로들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첫째, 대부분은 귀환을 체념한 상태로 정착해 일본인으로 변신했다. 노비를 비롯한 천민은 물론이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홍호현 이성현 등의 양반도 정착해 상급 무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무렵 일본의 여러 곳, 특히 규슈에는 조선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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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방위하던 의병들, 관군과 합동 전국적 전투 전개…전공 다툼으로 고초 겪거나 전쟁 후에 숙청당하기도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의 승리로 절망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항전의 의지를 되찾는 전기를 마련했다. 의병들은 초기에는 향토 방위에 주력했으나, 곧 다른 지역 의병들은 물론 관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전국적인 전투행위를 펼쳤다. 나주의 김천일은 수백 명의 의병을 지휘해 선조의 행재소로 북상하다가 강화도 작전을 펼쳤고, 한강 작전으로 승리했다. 광주에서 거병한 고경명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해 승전을 이끌어냈다. 관군과 명나라군의 평양성 탈환전에서 큰 공을 세운 의승군은 곧이어 서울 근교 한강가에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인해 함경도는 보존됐고, 가토오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두만강을 넘지 못해 전선의 확대가 저지됐으며,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됐다. 의병들, 전쟁에서의 역할의병들의 전국적인 활동으로 전선이 확대된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많은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백성들의 협조를 받아 유격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허를 찌르거나 전진과 후퇴의 길목을 장악해 혼란을 유발했고, 일본군은 수성전을 선호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도와 학정, 당파싸움으로 인해 전쟁 전에도 임꺽정(林巨正)의 난 등 민란이 발생했고, 전쟁 도중에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정부와 관군을 불신한 백성들은 떠돌다가(유망) 포로로 잡혀 부역했고, 심지어는 ‘순왜’로 변신해 적에 협조했다. 의병은 이들을 흡수해 전력을 이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그렇다면 생명까지 바쳤던 의병들은 가치와 명예를 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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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환경·전선·정보력 활용한 전략·전술 천재…다른 민족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신화 남겨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남다른 삶의 방식과 특별한 용기를 가졌다. 칠천량 전투로 조선 수군은 거의 사라졌고, 임금조차 수군을 해체한 뒤 충청도로 와서 훗날을 도모하라고 특별히 전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 이렇게 올렸다.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12척 있습니다. 전선은 비록 부족하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니 감히 저를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기가 질린 부하들이 주저하자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고, 결국 명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 133척을 격파했다.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수군으로 근무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짧은 기간의 수군 만호에서 파직된 이후에는 두만강 하구인 함경도의 조산보에서 만호로 근무했다.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을 건조했는데, 다음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그리고 5월 7일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승리를 이어갔다.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작전을 구사한, 전략과 전술의 천재였다. 해양환경과 전선 그리고 전술의 미묘한 상관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조선의 판옥선은 1555년 을묘왜란을 겪고 왜선에 대응할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연안용이자 방어용이며, 소나무 등의 침엽수를 이용했다. 길이가 보통 15m에서 20m에 달해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함포를 장착해서 먼 거리에서도 쏠 수 있다. 승선 인원은 100여 명이고, 다수의 노꾼을 가동해 속력을 낼 수 있어 신속한 전투에 편리했다. 반면에 일본의 ‘안택선’ ‘관선’ 등은 원양용인 데다 선체가 삼나무여서 내구성이 약했다. 따라서 크고 단단한 판옥선이나 거북선으로 충돌 작전을 펼 수 있었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수적으로 우수

  • 과학과 놀자

    세계인이 사랑하는 한국 농기구, 호미에 담긴 과학

     국립중앙과학관과 함께하는 과학 이야기 (10)세계 최대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에서 인기를 끈 한국 농기구가 있다.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미다. 국토가 넓은 미국은 원래 대량 재배에 최적화된 농기구가 많았다. 그런데 코로나 등의 영향으로 집 근처 텃밭이나 정원을 가꾸는 취미가 유행하면서 잡초 뽑기, 씨앗 심기 등 소규모 재배에 사용할 수 있는 호미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호미는 한반도에서 고대부터 사용하던 농기구다. 석기 시대 유물 중에서도 호미와 비슷한 모양의 도구가 있고, 고려속요 등 문학 작품에도 호미가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선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호미가 발달했다. 호미를 써 본 서양인들은 ‘편리하고 튼튼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호미가 편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안에 과학 원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호미의 날은 ‘ㄱ’자로 꺾인 예각을 이루고 있다. 덕분에 호미 날이 바닥에 닿을 때 마찰력이 줄어들어 작은 힘으로도 흙을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다. 또 흙을 파거나 잡초 뿌리를 제거할 때 지렛대 원리를 활용해 최소한의 힘으로 작업할 수 있다. 서양엔 작은 모종삽은 있지만, 호미처럼 날이 꺾인 모양의 농기구는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