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임진왜란서 조선을 구한 의병 (下)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의 승리로 절망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항전의 의지를 되찾는 전기를 마련했다. 의병들은 초기에는 향토 방위에 주력했으나, 곧 다른 지역 의병들은 물론 관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전국적인 전투행위를 펼쳤다. 나주의 김천일은 수백 명의 의병을 지휘해 선조의 행재소로 북상하다가 강화도 작전을 펼쳤고, 한강 작전으로 승리했다. 광주에서 거병한 고경명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해 승전을 이끌어냈다. 관군과 명나라군의 평양성 탈환전에서 큰 공을 세운 의승군은 곧이어 서울 근교 한강가에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인해 함경도는 보존됐고, 가토오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두만강을 넘지 못해 전선의 확대가 저지됐으며,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됐다. 의병들, 전쟁에서의 역할의병들의 전국적인 활동으로 전선이 확대된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많은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백성들의 협조를 받아 유격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허를 찌르거나 전진과 후퇴의 길목을 장악해 혼란을 유발했고, 일본군은 수성전을 선호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도와 학정, 당파싸움으로 인해 전쟁 전에도 임꺽정(林巨正)의 난 등 민란이 발생했고, 전쟁 도중에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정부와 관군을 불신한 백성들은 떠돌다가(유망) 포로로 잡혀 부역했고, 심지어는 ‘순왜’로 변신해 적에 협조했다. 의병은 이들을 흡수해 전력을 이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그렇다면 생명까지 바쳤던 의병들은 가치와 명예를 지키면서 전투에 몰두하고, 전후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을까?
그들과 관군은 군대 체계, 운영 방식, 특히 향리에서 벌이는 작전 방식 등에서 차이가 컸으며 상호 불신과 전공의 다툼 때문에 갈등이 적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의병의 전과가 관군을 능가했다. 따라서 패전과 무능, 직무유기의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과 직업군인들에게 의병의 존재는 매우 거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병은 점차 해체되고, 관군에 흡수됐다.
전투 중에 전사한 조헌, 김시민, 고경명 등의 의병장들은 명예를 얻고, 후손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았다. 반면에 관군과 다투거나 정부의 의견을 경시했던 의병장들은 비참했다. 형과 함께 거병해 뛰어난 전과를 세운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과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아 전쟁 중에 체포돼 고문을 받다가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전투 성과 거두고 고초 겪기도 처음 거병한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 홍의장군을 칭하면서 2000여 명의 병력을 운영했다. 낙동강 수로망의 거점인 의령 정암진 전투에서 승리해 일본군이 호남에 진출하는 통로를 막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군과 갈등을 벌였고, 결국 강화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595년 가을에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선조는 그의 재등용을 상주하는 신하들에게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는 고향에서 망우당을 짓고 도인처럼 빈궁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 밖에도 많은 이가 전쟁 중에도 고초를 겪었고, 전쟁 후에는 숙청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농민들도 전보다 더 억압당했다. 전쟁의 과정을 목도하고, 참여를 통해 세계관의 변화와 실력을 자각한 그들을 조선 사회가 용인할 리 없었다. 조선은 더 심각한 붕당 정치로 일관하다가 결국 또다시 병자호란을 당했다.
내부의 갈등과 경제의 어려움 등은 결국 국내 문제이므로 인(仁)·예(禮)·지(智)가 필요할 뿐이지만, 냉정한 국제관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만약 머지않아 ‘의’와 ‘의병’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촉발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임질 이유가 없는 젊은 세대, 다가올 미래의 주역인 어린 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궁금하다.
역사학자로서 의병들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의병 활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십니까? 전쟁이 끝난 뒤의 조선을 저세상에서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 기억해주세요 의병과 관군은 군대 체계, 운영 방식, 향리에서 벌이는 작전 방식 등에서 차이가 크고 상호 불신과 전공의 다툼 때문에 갈등이 적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의병의 전과가 관군을 능가했다. 따라서 패전과 무능, 직무유기의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과 직업군인들에게 의병의 존재는 거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병은 점차 해체되고, 관군에 흡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