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미완의 혁명 갑신정변(下)
개화파는 학습, 견학, 이론 구축, 정책 제정과 실천 등 많은 작업을 단기간에 추진했다. 주역인 김옥균은 1875년 전후부터 개화 세력을 규합했다. 1879년에는 개화승인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근대화 상황을 관찰하게 했고,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1881년 음력 12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개혁정치의 과정과 결과들을 참관하고, 실력 있는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이때 ‘탈아론’의 주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생각을 교류하면서 정보를 구하고 조언을 받는다.귀국 도중인 7월 시모노세키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한 사실을 들었던 그는 중요한 관직에 진출하면서 개화파 세력을 꾸준히 확장했다. 박영효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 3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개화파인 서광범 등을 대동했다.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영향력 있는 정치인,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면서 조선의 문명개화를 결심했다. 이때 김옥균도 일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체류하면서 <치도약론(治道略論)>을 저술했다. 또 조선 유학생들을 파견하게 해서 일본 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옥균은 1883년 3월 귀국한 뒤 프랑스를 모델로 삼아 박영효 등과 적극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신분제 폐지 등의 사회제도 대개혁과 산업 발전, 학교 설립과 국방 및 경찰력의 증강과 정비, 신앙의 자유 등의 ‘대경장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조선의 중립화라는 국가 정체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임오군란은 결국 개혁파들의 주장 실현과 정책 구현을 방해했다.
청국은 정권 장악 후 조선의 속방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친일적이며, 자주성을 표방한 개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하고 개혁을 방해했다. 또 척결의 대상인 민씨 수구파는 물론이고, 발전 모델을 청나라의 양무운동으로 설정한 온건 개화파도 적대관계로 변해갔다. 일본에 국채를 모집하러 갔다가 실패한 뒤 1884년 4월 귀국한 김옥균과 개화파는 결국 ‘위로부터의 대개혁’이라는 명분을 갖고 거사 즉 혁명을 준비했다.
때마침 1884년 봄부터 프랑스가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자 청나라와 프랑스 간에는 전쟁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5월 23일 청나라는 1500명의 병력만 남기고 철수했다. 이어 8월 들어 청나라가 패배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개화당은 청국이 군사행동을 못할 것으로 추정, 9월(음력 8월)을 거사 시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0월 30일 귀환한 일본공사에 거사 계획을 알리면서 공동작전을 제의했다. 공사관 병력 150명과 300만엔을 빌려주겠다는 구두약속을 받았으며, 일본은 군사행동에만 협력하며 수구파 제거와 내정 개혁 등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동의까지 얻었다.
12월 4일. 개화당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장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을 확보한 뒤 곳곳에서 수구파의 거물들을 처단하고, 다음날인 5일에는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당 요인과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 등 종친이 참여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외교관을 불러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의사를 전달했다.
또한 정강을 제정하고 6일 오전 9시경 이를 한양의 요소에 붙였고, 오후 3시에는 고종이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 시각 청군은 1500명으로 궁궐을 공격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된 개혁군과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 살해됐다.
개화당과 갑신정변은 모델로 삼았던 일본의 침략과 일부 인사의 친일행위로 인해 오해받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관직·토지·사상 등을 지키려는 유림(위정 척사파), 토지와 일상의 삶을 고수하는 백성(농민)과 달리 기득권과 가족까지 포기하면서 전체를 위한 개혁과 개화를 실천한 이상주의자였다. 또 갑신정변은 근대 사상의 탄생, 근대인의 출현에 공헌이 큰 미완의 혁명이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 번에 성공한 혁명도 없지만, 재시도되지 않은 혁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 기억해주세요 12월 4일. 개화당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장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을 확보한 뒤 곳곳에서 수구파의 거물들을 처단하고, 다음날인 5일에는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당 요인과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 등 종친이 참여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외교관을 불러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의사를 전달했다. 또한 정강을 제정하고 6일 오전 9시경 이를 한양의 요소에 붙였고, 오후 3시에는 고종이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 시각 청군은 1500명으로 궁궐을 공격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된 개혁군과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