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끝)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평가(下)

이처럼 동학은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했다. 동기를 유발하는 동시에 혁명적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군사력 등의 인적 자원을 제공하면서 동학화한 일반 농민과 공동으로 정부에 맞서 정면대결했다. 여기에 ‘척왜양’이라는 구호와 강령을 필두로 일본군과 벌인 본격적인 전투는 봉기의 성격과 위상을 혁명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그 무렵 일본 정부가 이 사태의 발발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척왜’ 구호가 등장했을 당시 이미 농촌까지 침투한 일본 스파이의 보고로 봉기의 성격과 진행 과정 등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청군의 상륙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의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7월부터 동학이 요구한 내용에 접근한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30년 가까이 충돌하던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비참한 전장이 됐다.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자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은 9월 중순 ‘척왜’를 선언하며 2차 거병했다. 불과 한 달 만인 10월 말 삼례역에만 11만 명의 동학군이 집결했으며, 손병희가 지휘하는 북접군도 남하했다. 드디어 동학 농민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정부·일본 연합군과 6~7일 동안 40~50회에 달하는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1만여 명 가운데 500여 명만 탈출하는 대패배를 당했다. 이어 다른 지역에서 김개남 부대와 손병희 부대가 패했고, 강원도와 황해도 등에서도 동학군은 패배했다. 12월 30일 밤 전봉준이 포로로 잡혀 서울로 압송되면서 군사행동은 끝났고, 이듬해 4월 그가 손화중 등과 함께 처형당하면서 1년여에 걸쳐 전투와 개혁정치를 실현하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혁명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조선의 사상과 신분 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행위의 주체와 성격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운명은 물론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전술상의 문제점, 남접과 북접의 갈등을 비롯한 청·일 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본격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이 있다.

< 연재를 마치며 … > 지난 3년 동안 ‘한국, 한국인 이야기’를 집필하면서 매번 아쉬움과 탄식, ‘만약 이렇게 됐더라면?’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는 가정이 불가능하지만, 역사학은 가정이 필수적입니다. ‘역사학은 미래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져주신 애독자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