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미완의 혁명 갑신정변 (上)
갑신정변이 첫 발생한 우정총국 건물.
갑신정변이 첫 발생한 우정총국 건물.
전근대 한국은 내부 모순이 폭발 직전까지 축적됐어도 혁명을 유발할 요인은 부족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갖춘 자연 재앙과 외부 침략이 거의 없었다.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직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는 부족했고, 혈연 중심의 향촌 공동체로 구성됐다. 특히 조선은 체제 유지를 절대가치로 표방한 성리학과 모든 권력을 그물망처럼 장악한 유림 집단 때문에 혁명의 발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는 개화기의 제2단계 과정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훗날 혁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 임시정부는 이 정변을 ‘갑신혁명당의 난’으로 정의하면서 ‘혁명’으로 평가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지금 종로의 조계사 옆인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수 개화당원이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요청과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군사정변을 시도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선언하고, 강령 등 실천 방법까지 선포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군사력에 패배해 ‘삼일천하’로 끝났다. 주도자들과 참여자들은 살해, 망명, 처형, 투옥, 유배를 당하고,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다. 무려 500~600여 명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역사학자로서 궁금하고, 한 인간으로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실패 위험성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정변’을 계획했을까. 어떻게 학습하고 이론을 확립하고, 세력을 규합하며 훈련했을까. 왜 미숙했다고 비판받은 방식으로 추진하고 참혹한 실패를 겪었을까.

먼저 그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시킨 조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2번에 걸친 ‘양요(프랑스 및 미국 군함의 침공)’를 거친 뒤 18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 조약을 맺으면서 비자발적으로 개항했다. 이어 심해지는 내부 모순과 개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고, 결국 청나라 및 서양과 불평등한 근대조약을 맺으면서 타율적으로 세계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중국 중심의 책봉 체제와 중화론에 안주하던 조선은 질서의 근간이 흔들렸고, 서양 문물을 우위로 한 신세계의 도래는 불가피했다. 그런데도 조선 사회엔 자주가 위협당하고, 혼란이 도래한다는 위기의식이 약한 듯했다. 개화파는 서양 문물을 이해했으므로 개방에 적극적이었으며, 내부 모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했고 개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갑신정변으로 표방된 그들의 개혁 목표는 김옥균이 집필한 <갑신일록>에 기록된 14개 조항에서 추측할 수 있다. 문벌 폐지와 인민의 평등권, 능력 중시의 관리 선발, 토지세금법 개혁, 간악한 부패 관리들의 근절, 곡식 대여제도의 영구 폐지 등은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사회제도, 부패 등의 내부 모순을 해결하는 사회개혁이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에 눈뜨고, 새 세상의 구현이라는 사명감을 자각한 이상주의자들은 어떤 과정과 계기를 통해 이런 세계관과 사회의식을 갖게 됐고, 현실에 관철하려 했을까.

개화파는 북학파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1876년 직후부터 일본에 파견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개항 후 30년 만에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한 근대국가였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뒤 입헌체제를 구상했고, 1870년부터 평민도 성을 허용했다. 1871년에 신분 해방령을 선포했고, 1872년에는 국민이 초등교육을 받게 했으며, 1873년에는 징병령을 발표해 평민의 입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877년 유신의 반동세력인 무사 출신과 서남 전쟁을 치른 뒤에는 자유민권 운동도 활발해졌다. 또한 영국에서 차관을 도입해 도쿄에서 요코하마 구간에 철도를 건설했고, 각종 분야에서 근대산업을 발전시켰다. 이 무렵인 1871년 11월 신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유럽 사절단은 1년10개월 동안 12개 나라를 순방하고 1873년 9월 귀국해 국가 개조에 필수적인 대규모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개화파는 근대 서구 국가를 모델로 삼고, ‘탈아론(脫亞論)’을 바탕으로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성공시켰다(성희엽 <조용한 혁명>). 따라서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박영호·서광범·서재필 등의 개화 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개화파는 북학파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1876년 직후부터 일본에 파견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개항 후 30년 만에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한 근대국가였다. 일본의 개화파는 근대 서구 국가를 모델로 삼고, ‘탈아론(脫亞論)’을 바탕으로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성공시켰다. 따라서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박영호·서광범·서재필 등의 개화 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