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과 협력해 일으킨 정변 '삼일천하'로 끝나…근대 사상의 탄생·근대인의 출현에 공헌 평가

    개화파는 학습, 견학, 이론 구축, 정책 제정과 실천 등 많은 작업을 단기간에 추진했다. 주역인 김옥균은 1875년 전후부터 개화 세력을 규합했다. 1879년에는 개화승인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근대화 상황을 관찰하게 했고,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1881년 음력 12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개혁정치의 과정과 결과들을 참관하고, 실력 있는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이때 ‘탈아론’의 주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생각을 교류하면서 정보를 구하고 조언을 받는다. 귀국 도중인 7월 시모노세키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한 사실을 들었던 그는 중요한 관직에 진출하면서 개화파 세력을 꾸준히 확장했다. 박영효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 3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개화파인 서광범 등을 대동했다.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영향력 있는 정치인,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면서 조선의 문명개화를 결심했다. 이때 김옥균도 일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체류하면서 을 저술했다. 또 조선 유학생들을 파견하게 해서 일본 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옥균은 1883년 3월 귀국한 뒤 프랑스를 모델로 삼아 박영효 등과 적극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신분제 폐지 등의 사회제도 대개혁과 산업 발전, 학교 설립과 국방 및 경찰력의 증강과 정비, 신앙의 자유 등의 ‘대경장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조선의 중립화라는 국가 정체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임오군란은 결국 개혁파들의 주장 실현과 정책 구현을 방해했다. 청국은 정권 장악 후 조선의 속방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친일적이며, 자주성을 표방한 개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하고 개혁을 방해했다. 또 척결의 대상인 민씨 수구파는 물론이고, 발전 모델을 청나라의 양무운동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개화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문명개화·자주독립 명분으로 군사정변 시도

    전근대 한국은 내부 모순이 폭발 직전까지 축적됐어도 혁명을 유발할 요인은 부족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갖춘 자연 재앙과 외부 침략이 거의 없었다.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직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는 부족했고, 혈연 중심의 향촌 공동체로 구성됐다. 특히 조선은 체제 유지를 절대가치로 표방한 성리학과 모든 권력을 그물망처럼 장악한 유림 집단 때문에 혁명의 발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는 개화기의 제2단계 과정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훗날 혁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 임시정부는 이 정변을 ‘갑신혁명당의 난’으로 정의하면서 ‘혁명’으로 평가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지금 종로의 조계사 옆인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수 개화당원이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요청과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군사정변을 시도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선언하고, 강령 등 실천 방법까지 선포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군사력에 패배해 ‘삼일천하’로 끝났다. 주도자들과 참여자들은 살해, 망명, 처형, 투옥, 유배를 당하고,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다. 무려 500~600여 명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역사학자로서 궁금하고, 한 인간으로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실패 위험성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정변’을 계획했을까. 어떻게 학습하고 이론을 확립하고, 세력을 규합하며 훈련했을까. 왜 미숙했다고 비판받은 방식으로 추진하고 참혹한 실패를 겪었을까. 먼저 그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시킨 조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2번에 걸친 ‘양요(프랑스 및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