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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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한 농민봉기…근대국가·근대국민으로 성숙하는 전기 만들어
승승장구하던 전봉준의 군대는 관군을 선제공격하다가 패배했고, 초토사인 홍계훈은 이를 계기로 탐관오리의 숙청을 약속하면서 봉기군의 해산을 요구했다. 전봉준은 그동안 제기했던 격문, 강령, 개혁안 등을 정리해 ‘12개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즉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리고,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하며,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하게 벌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줄 것 등의 혁명적 내용이었다. 결국 ‘전주화약’이 성립됐고, 동학 농민군은 고향으로 돌아가 포(包)를 설치하고 접을 조직해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심지어는 황해도 평안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봉기의 근원지인 전라도 일대에선 젊은이의 대다수가 동학에 입교할 정도였다. 동학 농민군은 ‘도인(道人)과 정부가 서정(庶政)을 협력한다’는 전주화약의 조항에 근거해 마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한 뒤 각종 개혁을 주도했다. 정부 관리의 힘이 미치지 못해 일종의 ‘해방구’적 성격도 띠었다. 이처럼 동학은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했다. 동기를 유발하는 동시에 혁명적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군사력 등의 인적 자원을 제공하면서 동학화한 일반 농민과 공동으로 정부에 맞서 정면대결했다. 여기에 ‘척왜양’이라는 구호와 강령을 필두로 일본군과 벌인 본격적인 전투는 봉기의 성격과 위상을 혁명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그 무렵 일본 정부가 이 사태의 발발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척왜’ 구호가 등장했을 당시 이미 농촌까지 침투한 일본 스파이의 보고로 봉기의 성격과 진행 과정 등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청군의 상륙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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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전쟁·전염병·지배층 횡포 등 도탄에 빠진 백성…이상세계 모델 제시한 동학 등장하자 전국 확산
1894년 2월 1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접주인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켜 1년여간 정부 및 일본군에게 무력 저항을 하다 1894년 말 진압당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동학교도인가’ 또는 ‘농민인가’란 주체 문제, ‘혁명인가’ 혹은 ‘민란인가’란 성격 문제, 결과와 역사적 의미 등 상반된 평가로 인해서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와 양반 유림, 부정적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한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으며,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 이 봉기는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추진됐을까?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백성의 보호와 관리’라는 국가 기능을 상실해 가고, 백성은 몇 차례에 걸친 전쟁, 이상기후로 인한 흉작과 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대참변을 여러 번 겪었다. 그 와중에도 성리학적 세계관과 신분제도로 무장한 양반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는 한계점을 넘어 19세기 초에는 ‘관서민란(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등이 발생했다. 백성은 불만과 저항 의지를 표출할 수 있고, 희망찬 미래와 새 세상을 추구하는 미륵신앙, 후천개벽 등 민간신앙과 , 등 예언서에 빠져들었다. 일부 지식인 사회도 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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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과 협력해 일으킨 정변 '삼일천하'로 끝나…근대 사상의 탄생·근대인의 출현에 공헌 평가
개화파는 학습, 견학, 이론 구축, 정책 제정과 실천 등 많은 작업을 단기간에 추진했다. 주역인 김옥균은 1875년 전후부터 개화 세력을 규합했다. 1879년에는 개화승인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근대화 상황을 관찰하게 했고,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1881년 음력 12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개혁정치의 과정과 결과들을 참관하고, 실력 있는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이때 ‘탈아론’의 주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생각을 교류하면서 정보를 구하고 조언을 받는다. 귀국 도중인 7월 시모노세키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한 사실을 들었던 그는 중요한 관직에 진출하면서 개화파 세력을 꾸준히 확장했다. 박영효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 3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개화파인 서광범 등을 대동했다.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영향력 있는 정치인,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면서 조선의 문명개화를 결심했다. 이때 김옥균도 일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체류하면서 을 저술했다. 또 조선 유학생들을 파견하게 해서 일본 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옥균은 1883년 3월 귀국한 뒤 프랑스를 모델로 삼아 박영효 등과 적극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신분제 폐지 등의 사회제도 대개혁과 산업 발전, 학교 설립과 국방 및 경찰력의 증강과 정비, 신앙의 자유 등의 ‘대경장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조선의 중립화라는 국가 정체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임오군란은 결국 개혁파들의 주장 실현과 정책 구현을 방해했다. 청국은 정권 장악 후 조선의 속방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친일적이며, 자주성을 표방한 개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하고 개혁을 방해했다. 또 척결의 대상인 민씨 수구파는 물론이고, 발전 모델을 청나라의 양무운동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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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문명개화·자주독립 명분으로 군사정변 시도
전근대 한국은 내부 모순이 폭발 직전까지 축적됐어도 혁명을 유발할 요인은 부족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갖춘 자연 재앙과 외부 침략이 거의 없었다.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직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는 부족했고, 혈연 중심의 향촌 공동체로 구성됐다. 특히 조선은 체제 유지를 절대가치로 표방한 성리학과 모든 권력을 그물망처럼 장악한 유림 집단 때문에 혁명의 발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는 개화기의 제2단계 과정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훗날 혁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 임시정부는 이 정변을 ‘갑신혁명당의 난’으로 정의하면서 ‘혁명’으로 평가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지금 종로의 조계사 옆인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수 개화당원이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요청과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군사정변을 시도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선언하고, 강령 등 실천 방법까지 선포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군사력에 패배해 ‘삼일천하’로 끝났다. 주도자들과 참여자들은 살해, 망명, 처형, 투옥, 유배를 당하고,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다. 무려 500~600여 명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역사학자로서 궁금하고, 한 인간으로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실패 위험성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정변’을 계획했을까. 어떻게 학습하고 이론을 확립하고, 세력을 규합하며 훈련했을까. 왜 미숙했다고 비판받은 방식으로 추진하고 참혹한 실패를 겪었을까. 먼저 그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시킨 조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2번에 걸친 ‘양요(프랑스 및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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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일본과 불평등 병자수호조약 체결…개방·개혁정책 펼치며 대원군과 차별화
개항 후 한국의 지성계와 정계는 친일·신진·개화·진보 세력과 친청·기득·쇄국·보수 세력으로 분리돼 갈등 또는 협력했다.1910년 멸망할 때까지 병인양요부터는 44년, 강화도 조약부터는 35년간 소위 강산이 세 번 이상 변했다. 이 격렬한 역사의 전환기는 참여한 인물과 주요 사건을 근거로 구분하면 총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75~1882년 운양호 사건부터 임오군란까지다.고종과 명성황후가 장악한 신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와 일본의 군사적 위력을 의식해 1876년 2월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1811년 통신사가 끊어진 뒤 65년 만에 교린 외교가 아닌 근대 외교가 시작됐다. 12조로 된 이 불평등조약엔 문제점이 많았다. 제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원산, 인천)를 20개월 내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인천은 청나라를 의식한 곳으로, 한양으로 침투하는 데 최단 거리다. 원산은 동해 진출에 적합한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남진 저지에 적합한 장소다. 이 조약이 경제적 이익, 조선 지배뿐만 아니라 국제관계, 해양의 중요성 등을 고려한 장기정책이었음은 청일전쟁·러일전쟁·독도 문제 등에서 확인됐다. 또한 일본은 제7조를 통해 조선 연안을 측심하고 측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군사작전의 교통로는 물론 상륙 지점을 손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이 조약으로 패배감은 물론이고, 개항과 서구문명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확대 재생산됐다.반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제1조인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은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500년 가까이 조공과 책봉체제에 묶인 중화적 질서를 탈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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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두 번의 '양요' 거치며 쇄국정책 옳았다고 착각…4년 후 일본 공격 대비하는 교훈조차 못 얻어
미국은 1847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포경선들을 북태평양 어장으로 진출시켜 러시아와 부딪쳤다. 1853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강행해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청나라, 필리핀 등과 캄차카 반도, 쿠릴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은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서해안의 모든 관청에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와 신도를 죽였다.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이를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두 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동 입구인 염창에 정박하고, 다음날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하자 도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곧 산둥으로 회항한 함대는 준비를 마친 뒤 10월 14일 군함 네 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어 벌어진 문수산성 전투에서 포수와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 지역주민과 합동작전을 벌인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를 약탈했다.그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 이 사건을 빌미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한 군함 다섯 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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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파죽지세에 한양서 임금 탈출하며 '아비규환'…핍박받던 농민·노비 등 의병으로 궐기 전국서 유격전
의병(義兵) 의승(義僧) 의기(義妓) 의곡(義穀). 이런 선조들을 생각하면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생기가 돈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지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비상시국이었고, 정부와 군대의 무능과 부재 현상을 알리는 안타까운 증거들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활동과 전적1592년 4월 13일 17시경 ‘임진왜란’ 또는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상륙 후 두 번의 전투를 마치고 북상했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배수진을 격파한 뒤에는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군했다. 조선의 군대는 제 역할을 못했고, 임금이 황급히 탈출한 서울은 아비규환이 됐다. 동요한 백성들은 공포에 떠는 존망의 기로에서 이순신의 옥포해전 승리 소식을 접했다. 이와 함께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재산을 털고 노비들을 포함해 의병을 일으킨 소식을 들었다. 역사에서 의병의 존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그는 ‘홍의장군’을 칭하면서 1000여 명의 군사로 낙동강 전투 등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고경명은 전라도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동원했으며, 남원 지역의 안영(安瑛), 나주의 김천일(金天鎰) 등의 의병과 합심해 호남을 방어했다.조헌은 충북 옥천에서 일어나 승군 500명과 합동 작전으로 청주성을 수복했으나, 금산에서 관군의 불참으로 불리한 전투를 벌이다가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함경도 북쪽에서는 정문부가 적군에 투항한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소위 북관대첩을 이뤘다. 이 밖에 젊은 김덕룡 형제를 비롯해 합천에서 정인홍, 고령에서 김면, 손인갑, 권응수 등이 있었다. 1차 진주성 대첩에 참여한 최경회, 심대승, 임계성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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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피해 입은 조선, 승전·패전 주장 엇갈려…조선군·백성 22만여명 사망하고 농토 3분의 1 유실
임진왜란의 결과로 본 조선의 패배임진왜란이 왜 패전인가는 전쟁 발생과 진행 과정, 전투 상황, 결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다.1592년 4월 일본 규슈 북부의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대마도 병력을 선봉으로 700척에 1만8700명의 병력으로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 첨사인 정발은 전사하고 군대는 패배했다. 이어 벌어진 동래성 전투는 하루를 못 견딘 채 패배했고, 송상현은 전사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2만2000여 명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군대도 함께 상륙했다. 불가사의하지만 봉화체제의 문제로 왕궁은 4일째에야 침공 사실을 알 수 있었다.조정에서 급파한 이일은 상주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어 북방에서 맹위를 떨친 신립 장군이 기병 8000여 명 등 1만6000명의 군사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 또한 남한강변의 탄금대에 친 배수진이 실패하며 대패했다. 일본군은 3개 방면으로 나눠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당황한 선조와 사대부들은 피난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도성을 탈출했다. 임해군과 광해군 등 왕자들을 군사 모집을 목적으로 북방으로 출발시켰고, 황급하게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했다.선조 일행은 평양에 도착했고, 곧이어 한양이 불과 20일 만에 함락당했다. 무저항 상태에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한 것이다. 다시 의주로 피난 온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고자 요동 총독에게 사신을 파견했다.반면 이덕형, 이항복 등의 신하들은 선조를 말렸다. 비변사 당상인 신잡은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 여러 장수는 패배가 아니라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는 일을 두려워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다행히 선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