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개항에서 임오군란까지 (上)
개항 후 한국의 지성계와 정계는 친일·신진·개화·진보 세력과 친청·기득·쇄국·보수 세력으로 분리돼 갈등 또는 협력했다.1910년 멸망할 때까지 병인양요부터는 44년, 강화도 조약부터는 35년간 소위 강산이 세 번 이상 변했다. 이 격렬한 역사의 전환기는 참여한 인물과 주요 사건을 근거로 구분하면 총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75~1882년 운양호 사건부터 임오군란까지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장악한 신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와 일본의 군사적 위력을 의식해 1876년 2월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1811년 통신사가 끊어진 뒤 65년 만에 교린 외교가 아닌 근대 외교가 시작됐다. 12조로 된 이 불평등조약엔 문제점이 많았다. 제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원산, 인천)를 20개월 내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인천은 청나라를 의식한 곳으로, 한양으로 침투하는 데 최단 거리다. 원산은 동해 진출에 적합한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남진 저지에 적합한 장소다. 이 조약이 경제적 이익, 조선 지배뿐만 아니라 국제관계, 해양의 중요성 등을 고려한 장기정책이었음은 청일전쟁·러일전쟁·독도 문제 등에서 확인됐다. 또한 일본은 제7조를 통해 조선 연안을 측심하고 측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군사작전의 교통로는 물론 상륙 지점을 손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이 조약으로 패배감은 물론이고, 개항과 서구문명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확대 재생산됐다.
반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제1조인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은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500년 가까이 조공과 책봉체제에 묶인 중화적 질서를 탈피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조선이 크게 반성하고 강력한 의지와 능력을 배양했다면 근대 문명의 혜택을 입었을 것이다.
일본은 서양 열강들이 부과한 유사한 개항 압력에 효율적으로 적응해 성공했다. 그들은 어떻게 성공했고, 우리는 왜 실패했을까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조약을 체결한 신정권은 대원군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개방과 개혁을 성공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조선의 능력과 현실을 자각하고, 불안과 충격, 혼란에 휩싸인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대응했다.
첫째, 외세를 배격하는, 즉 ‘척양 척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유림들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이며 기득권 세력이었다. 대원군을 실각시켰던 이들은 명성황후 세력에 저항했고, 조약을 극렬하게 비판했다. 최익현은 ‘지부복궐상소(도끼를 옆에 차고 대궐 앞에 엎드려 올리는 상소)’를 벌일 정도였다. 이들은 상황 변화에 따라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세력으로 발전하다가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현대사에서 저항적인 애국자,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
둘째, 자생적인 개화주의자들과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진 세력이다. 훗날 갑신정변을 비롯해 개화를 주도한 서광범·박영효·김옥균·김홍집 등 젊은 청년은 북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지도자였던 오경석·유대치 등은 역관 출신이었고, 정신적인 지주인 박규수는 <열하일기>의 저자인 박지원의 손자였다. 임오군란 이후 정책 차이로 인해 사대당(수구당)인 온건 개혁파와 독립당(개화당)인 급진 개혁파로 분리됐고, 각각 청나라와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해 현실에서 실패했고, 후세까지 친일파라고 비판받았다. 물론 박영효 등의 반역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적·경제적 기득권층이면서도 개혁과 정의, 애국을 추구한 이상주의자였다.
셋째, 평민 출신 농민의 대다수인 백성이다. 신분적 제약과 경제적 빈곤으로 교육과 견문의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유교 정치의 영향으로 충·효·공동체 의식이 강했지만, 국가의식 등은 미약했고, 개혁과 개방에도 미온적이었다.
따라서 비판의식과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사회개혁에 동참하는 ‘민중’으로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런 동향 속에서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은 어떤 개혁정책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했을까.√ 기억해주세요 고종과 명성황후가 장악한 신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와 일본의 군사적 위력을 의식해 1876년 2월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1811년 통신사가 끊어진 뒤 65년 만에 교린 외교가 아닌 근대 외교가 시작됐다. 12조로 된 이 불평등조약엔 문제점이 많았다. 제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원산, 인천)를 20개월 내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