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평가(上)
1894년 2월 1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접주인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켜 1년여간 정부 및 일본군에게 무력 저항을 하다 1894년 말 진압당했다.이 역사적인 사건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동학교도인가’ 또는 ‘농민인가’란 주체 문제, ‘혁명인가’ 혹은 ‘민란인가’란 성격 문제, 결과와 역사적 의미 등 상반된 평가로 인해서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와 양반 유림, 부정적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한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으며,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
이 봉기는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추진됐을까?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백성의 보호와 관리’라는 국가 기능을 상실해 가고, 백성은 몇 차례에 걸친 전쟁, 이상기후로 인한 흉작과 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대참변을 여러 번 겪었다. 그 와중에도 성리학적 세계관과 신분제도로 무장한 양반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는 한계점을 넘어 19세기 초에는 ‘관서민란(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등이 발생했다. 백성은 불만과 저항 의지를 표출할 수 있고, 희망찬 미래와 새 세상을 추구하는 미륵신앙, 후천개벽 등 민간신앙과 <정감록>, <격암록> 등 예언서에 빠져들었다. 일부 지식인 사회도 부국강병론과 개방, 서양 문물의 도입 등을 요구하며 민권 의식의 고양과 사회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내천(人乃天)’이란 평등의 가치관과 이상 세계의 모델을 제시한 동학이 등장하자, 서학과 서양 문물에 배타적인 농민들은 이 자생 신앙에 열광했다. 전라도 일대에서 일어난 동학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864년 3월 사교로 몰려 창시자인 최제우가 사형을 당했다. 한편 1875년의 운양호 사건 이후에 일본과 청국을 필두로 미국과 독일 등 서구 열강들은 서양 문물을 보급하는 한편 상업, 광업, 농업 등 경제적인 침탈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자국 상품을 판매하고 쌀 등의 자원을 수탈하면서 조선 경제와 농가를 붕괴시키는 중이었다.
세력을 확장한 동학교도들은 1892년 11월에는 삼남 지방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면서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하고, 동학을 인정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전봉준 등은 서학을 비판하고, 외국 상인을 추방할 것을 결의했다. 1893년에는 각지에서 상경한 대규모 교도들이 서울의 궁궐 앞에서 상소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은 개혁과 봉기의 이론을 만들었고, 주도할 조직망과 군사력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마침내 전봉준 등의 남접은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악행을 자행하는 신임 군수 조병갑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회운동과 정치 변혁은 상항에 따라 단계적으로 변화하고 확장된다. 초기 봉기는 고부 관청을 습격한 후 군수를 효수했고, 비록 행동 강령은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고 했지만, 지역 민란의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더 심하게 탄압하고, 분노를 유발하는 악행들을 자행하자 전봉준은 다시 4월에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보국안민(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의 의지를 담은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했다.
불과 10여 일 만에 근처 지역에서 농민들을 포함한 1만여 명이 집결하자 전봉준은 ‘척왜양’를 표방하고, 한양을 공격해 정부의 고위 관리와 세력을 죽인다는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이어 정부군과 황토현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전주성을 무혈로 점령했다. 체제 위기를 두려워한 정부는 외세 개입의 위험성을 우려하면서도 청군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대기하던 일본군도 톈진(천진)조약을 빌미로 대규모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 무렵 최시형 등 북접 세력은 고수하던 무저항 종교운동을 포기하고, 전봉준의 무장 노선을 지지하면서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이 봉기에 참여할 것을 포고했다.√ 기억해주세요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와 양반 유림,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으며,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