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下)
어재연 장군 등이 혈전을 벌인 강화도 광성돈대.
어재연 장군 등이 혈전을 벌인 강화도 광성돈대.
미국은 1847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포경선들을 북태평양 어장으로 진출시켜 러시아와 부딪쳤다. 1853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강행해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청나라, 필리핀 등과 캄차카 반도, 쿠릴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은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서해안의 모든 관청에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와 신도를 죽였다.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이를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두 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동 입구인 염창에 정박하고, 다음날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하자 도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곧 산둥으로 회항한 함대는 준비를 마친 뒤 10월 14일 군함 네 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어 벌어진 문수산성 전투에서 포수와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 지역주민과 합동작전을 벌인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 이 사건을 빌미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한 군함 다섯 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의 초입인 초지진을 점령했고, 다음날에는 옆의 덕진진과 광성보를 공격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최소한 253명의 군인과 다수의 백성이 전사했다. 반면 미국은 단 3명 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국가와 군대가 백성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대원군은 두 번의 ‘양요’에서 승리했다고 자처하면서 쇄국정책이 옳았음을 주장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하지만 조선은 전투에서 졌고, 다수의 백성이 죽었으며, 불과 4년 뒤 발생할 일본의 공격을 예방하는 교훈조차 얻지 못했다.

이 무렵 일본은 서양을 자기화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침략했다. 1872년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만들었고, 1874년 5월에는 대만을 침공했다. 1875년엔 류큐국을 점령해 1879년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었다. 다음 단계는 조선이었고, 열강들은 이를 예측했다. 하지만 물러난 대원군도,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정체제도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예고 없이 부산항에 입항했고, 운요호를 비롯한 함대 세 척이 강화 해안에 상륙해 조선군을 패배시켰다. 이어 ‘조선병탄론’ 등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열강들에 외교전을 펼쳤고, 군함 세 척과 수송선 세 척에 전권대표와 해병대 등 800여 명을 태우고 강화도 연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조선의 신정권은 최초의 근대조약이면서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사대교린 외교체제는 무너졌고, 조선은 청나라에서 벗어난 자주국으로 변신해 일본에 종속되기 편하게 변형됐다. 신정부는 자국책을 강구해 서양 세력과 근대조약을 맺으면서 개항과 또 다른 개혁을 선택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놓고 ‘조선의 멸망을 늦췄다’ ‘조선이 회생할 기회를 상실했다’ 등 상반된 평가가 난무한다. 그 무렵 조선은 외국 세력과 정면 대결할 수도,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와 질서 재편의 혼란기에는 우연이 존재하고, 약자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록 실패할 확률이 높았어도 지연이라는 시차 작전과 강온 양면의 외교술을 발휘해볼 만한 여지는 있었다.

대원군의 역사적인 성격과 정책은 오늘 우리에게도 교훈을 준다. 사회 개혁은 사적인 경험과 교조적인 행동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신념보다 자유심, 명분보다 필요성, 사심보다 공감이 더 효율성이 높다. 백성은 전 시대의 폭정에 반동적인 존재로 대원군을 지지했지만, 결국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절망한 백성은 국가 의식이 희박해졌고, 이는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에 보이듯 조선 멸망에 큰 요인이 됐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놓고 ‘조선의 멸망을 늦췄다’ ‘조선이 회생할 기회를 상실했다’ 등 상반된 평가가 난무한다. 그 무렵 조선은 외국 세력과 정면 대결할 수도,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와 질서 재편의 혼란기에는 우연이 존재하고, 약자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록 실패할 확률이 높았어도 지연이라는 시차 작전과 강온 양면의 외교술을 발휘해볼 만한 여지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