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조선통신사가 못 본 일본 (下)
17세기 말~18세기 초의 아리타 도자기.
17세기 말~18세기 초의 아리타 도자기.
조선 도공인 이삼평이 가마를 연 아리다(有田) 자기는 매우 유명해 유럽에서 주문자 생산이 많았고, 독일 등에는 일본 도자기 연구소들이 설립돼 도자기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도자기와 더불어 전파된 전통 그림인 ‘부세화(우키요에)’는 유럽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인상파가 성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모네, 마네, 고흐 등은 일본 문화에 심취해 작품에 많이 반영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중국의 해안가 도시들,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샴(태국), 믈라카 해협, 자바섬(자카르타), 루손(마닐라), 타이완 등에 마을을 만들었고, 상관을 설치하면서 무역선을 파견했다. 철, 일본도, 은, 구리, 심지어 서양식을 모방해 제작한 총까지 수출했다. 일부 지역에는 왜구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조선 포로도 있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네덜란드와 청나라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 살던 아이누(하이)인들, 남쪽의 유구(오키나와 열도)를 지나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벌였고,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대무역망’과도 연결됐다.

일본이 이렇게 상업 발달과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데는 내부의 발전도 있었지만 막부의 해양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지만, 해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특정 상인들에게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주인장(朱印狀)을 발부했는데, 이 증서를 소지한 ‘주인선’은 일본 배를 근간으로 중국의 장크 스타일에 서양 범선의 특징을 혼합해 만들었다. 조선을 침공했던 선봉장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는 1604년 약 550t급의 주인선을 건조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특별명령을 내려 영국형 범선을 건조하도록 지시한 일도 있었다. 드디어 1613년 9월 15일, 센다이번에서는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180여 명으로 구성된 유럽 파견 사절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에스파냐의 지도를 받아 건조된 갤리온선인 ‘산후안 바우티스타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의 아카푸르코에 기항해 멕시코 부왕의 환영을 받았다. 다시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냐에 도착해 1615년 1월 2일에는 국왕인 펠리페 3세를, 같은 해 9월 12일에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7년 뒤 다시 태평양을 건너 1620년 8월 24일 귀국한다. 통상 교섭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귀국했을 때 막부는 이미 기독교 금지령과 대형 함선의 제조 금지령, 해외 도항 금지령이 내렸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인식을 바꾸고, 세계를 수용할 준비를 하도록 만들었다. 현명한 막부는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만 나가사키에서 무역하도록 허락하면서 조건을 걸었다. 입항할 때 반드시 해외의 떠도는 소문(정보)을 수집한 보고서를 작성해 나가사키 행정당국(부교)에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일종의 정보 보고서였다.
2019년 8월 5일 대마도에서 있었던 ‘조선통신사 행렬’ 재연 행사.
2019년 8월 5일 대마도에서 있었던 ‘조선통신사 행렬’ 재연 행사.
일본 막부는 세계가 해양의 시대로 변모했으며 해양력 강화는 국가의 부강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열심히 학습했다. 반면 두 번의 참혹한 전화를 겪고 난 뒤에도 통신사들은 세계정세는커녕 일본이 개량된 배로 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며 무역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리고 일본의 내해나 강에서 움직이는 소형 배들을 관찰하고, 때론 무시하기까지 했다.

독특한 세계관을 고수한 성리학자들의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된 채 명분과 이념을 표방하며 권력투쟁을 벌이다 연달아 전쟁의 참화를 겪어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수십만의 백성을 북으로 남으로 끌려가게 했다. 그러고도 다시 남인·북인·노론·소론으로 나뉘어 피를 부르는 당파싸움을 벌이면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렴주구와 굶주림, 질병의 창궐로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통신사 파견이 끊어진 얼마 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875년 운양호를 필두로 세 척의 일본 군함을 끌고 왔고, 조선 정부는 저항 한번 못한 채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경멸하던 ‘왜놈’들에게 말이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일본 막부는 세계가 해양의 시대로 변모했으며 해양력 강화는 국가의 부강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열심히 학습했다. 반면 두 번의 참혹한 전화를 겪고 난 뒤 에도 통신사들은 세계 정세는 커녕 일본이 개량된 배를 운영하면서 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며 무역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몰랐다. 그리고 일본의 내해나 강에서 움직이는 소형 배들을 관찰하고, 때로는 무시하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