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조선통신사 파견 목적과 행적들 (下)

일본은 멸시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 학습의 대상이었지만 정치인이면서 학자였던 조선통신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이 심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적인 상태에서도 일본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다.
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지칭하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불렀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스러운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뒤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에 도움 될 정보와 농법 등 신기술을 찾아내 개선을 건의한 경우도 있었다. 고구마를 도입한 조엄은 1763년 파견됐는데, 현실적인 영조의 명으로 일본의 군사와 선박, 관방체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조사했다. 함께 간 남옥은 일본 선박들을 상세하게 관찰했고, 오히려 일본이 ‘투박하고 엉성한 우리 배를 보면 비웃는다’는 글을 함께 남겼다.
훗날 박지원 등 혁신적인 북학파들에게 영향 끼친 원중거도 화선(和船), 즉 일본 배가 민첩하고 첨저형으로 되었다며 우리 배의 약점을 보완하는 내용을 썼다. 그가 건조한 비선(飛船)은 한강에서 시험 운행을 할 때 역풍을 헤치고 나갔다. 이들은 귀국 후 두 나라의 배를 절충해 만든 모형을 통제영에 보내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고,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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