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조선통신사 파견 목적과 행적들 (下)
조선통신사 행사는 두 나라의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약점을 파악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조선이 재침을 방어하고 역습의 기회를 모색한다면, 내정을 샅샅이 탐지하고 해양력을 파악하며 복잡한 해로망까지도 탐지할 기회였다. 물론 ‘시호(승냥이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듯한 불안감, 종묘사직과 능묘까지 훼손당한 적개심과 오기 등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과 무력감 때문에 파괴된 나라와 피해 입은 백성들에 대한 도리를 떠올려야 했다.일본은 멸시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 학습의 대상이었지만 정치인이면서 학자였던 조선통신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이 심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적인 상태에서도 일본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다.
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지칭하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불렀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스러운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뒤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의 기술 능력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본 정약용은 통신사들의 거만한 행적과 문인의 행태, 자기과시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연행사였던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통렬하게 비판했다. 사실 일본 지식인들은 ‘신국(神國)’ 의식을 갖고, 일부에서는 통신사를 ‘사죄 사절’ ‘복속 사절’로 인식했다.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통신사들과 교류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조차 일본 천황과 청나라 천자를 대등하게 놓고, 조선 국왕을 일본의 막부장군과 대등하게 보려고 했다. 이런 인식과 관례가 계속돼 결국 정한론 등으로 이어졌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조선에 도움 될 정보와 농법 등 신기술을 찾아내 개선을 건의한 경우도 있었다. 고구마를 도입한 조엄은 1763년 파견됐는데, 현실적인 영조의 명으로 일본의 군사와 선박, 관방체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조사했다. 함께 간 남옥은 일본 선박들을 상세하게 관찰했고, 오히려 일본이 ‘투박하고 엉성한 우리 배를 보면 비웃는다’는 글을 함께 남겼다.
훗날 박지원 등 혁신적인 북학파들에게 영향 끼친 원중거도 화선(和船), 즉 일본 배가 민첩하고 첨저형으로 되었다며 우리 배의 약점을 보완하는 내용을 썼다. 그가 건조한 비선(飛船)은 한강에서 시험 운행을 할 때 역풍을 헤치고 나갔다. 이들은 귀국 후 두 나라의 배를 절충해 만든 모형을 통제영에 보내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고,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침략 당사국에 파견한 사절단이라면 강한 애국심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초기에는 전쟁 상황의 규명과 책임론을 거론하고, 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면서 백성들의 자의식을 살려야 한다. 아울러 청나라의 침략이라는 현실에 대응할 방법론도 일본 측과 논의하고 찾아야 했다.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까지 이어진 일본이라는 ‘창(window)’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고 서구 문화와 사상, 기술 등을 도입하고 진보한 세상을 지향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관찰력과 변별력, 지적 능력이 뛰어난 통신사들은 현실성이 부족하고 관념적인 성리학적 세계에 사로잡혀 지적 능력을 과시하는 데 시간을 낭비했고,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