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조선통신사가 못 본 일본 (上)
조선은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란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다.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이라고 부르며 성리학적 지식을 뽐내던 조선 통신사들이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했다.왜인이라고 경멸하며 눈길을 돌렸던 배타적인 통신사들도 놀라면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수도였던 오사카는 인구가 4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해 물자가 풍부하고, 많은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도시였다. 도시는 정비가 잘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도로가 숫돌처럼 반반했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췄다. 강과 운하에는 ‘무지개 다리’들이 걸려 있었고, 수많은 선박이 오갔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거리와 수입품을 전시해놓은 시장들, 목욕의 풍습과 변소의 청결함도 경이로운 눈초리로 기록했다.
에도(1868년 이후 동경)는 막부의 쇼군이 거주했던 정치수도였다. 고구려 유민과 신라인들이 개척한 동경만 지역의 작은 어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업과 무역 등을 염두에 두고 건설한 해양도시였다. 발전을 거듭하더니 18세기 초에는 상하수도 설비 등 각종 인프라가 구축됐고, 인구 100만여 명의 세계적 도시로 변모했다. 반면 20세기 초 한양 인구는 25만 명 정도였다.
일본은 발달한 수차를 사용했고, 수리시설을 완벽하게 갖춰 따뜻한 기후를 활용해 삼모작을 하고 있었다. 수산업이 발달해 전 해역에서 어로활동이 활발했다. 혼슈 북쪽 아키다, 아모모리 등의 해역에서 잡은 ‘연어’와 ‘다시마’ 등을 실은 상선들이 조선통신사선들이 통과했던 혼슈와 규슈 사이의 간몬 해협을 지나 오사카에 정박하거나 에도까지 올라와 상업을 했다. 심지어 태평양으로 조업을 나가 17~18세기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 일본 선박들이 표착하는 사례들이 보고됐다. 특히 고래잡이, 즉 포경업은 통신사들을 놀랍게 했다. 우리도 부산의 동삼동 유적,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 등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서 볼 수 있듯 신석기 시대부터 고래잡이를 했다. 하지만 이 무렵 일본은 개량된 작살 등을 사용해 산업 단계로 성숙했다. 그 때문에 어부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출어했고, 그것을 명분으로 지금까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이다. 에도 막부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조선 통신사들에게 대마도에서부터 고래잡이 모습을 구경거리로 보여줬다. 포경업이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가는 <해유록>을 남긴 신유한을 비롯한 통신단의 기록에 잘 나와 있다. 왜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났을까.
조선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고수와 국제 교류, 상업 발달로 인한 해양 세력의 성장을 억제할 목적 등으로 쇄국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다. 일본의 에도막부도 막부체제라는 특수한 정치체제, 기독교 전파로 인한 사회 혼란 등의 문제점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의 틀 때문에 해금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무역과 국제 교류의 필요성을 잘 알았으므로 실용적으로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규슈의 나가사키만에 육지에서 불과 10여m 밖에다 ‘데지마(出島)’라는 사다리꼴 모양의 조그만 인공섬을 만들었다. 그곳을 개항지로 제한해 서양 및 청나라 등과 무역을 하고 천문학, 지리학, 화학, 토목술, 조선술, 항해술, 무기 제조 등의 발전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또 ‘란가쿠(蘭學·네덜란드를 가리키는 단어)’를 정립해 성리학에 심취한 조선 통신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무역품은 도자기였다. 조선에서 천대받다가 전쟁 때 포로로 잡혀간 무명도공들이 빚은 도자기는 나가사키의 ‘데지마’나 ‘이마리항’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됐다. 1650년대 이후 이마리 자기 형태가 중국 경덕진 자기의 복제품처럼 변신하는데, 청나라의 쇄국정책으로 도자기 수출이 어려워지자 이마리 자기는 중국 정크선에 실려 캄보디아로 수출됐다. 네덜란드 상인이 1650년부터 1세기 동안 유럽으로 운반한 도자기는 무려 520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