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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역사에서 천재가 등장할 때 사회는 급변하고, 동시대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족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의 천재’란 어떤 성격과 능력을 갖췄을까. 이들은 머리가 좋고,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과 현상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다. 더불어 모든 사람을 아끼고, 시대와 자연까지 돌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한다. 나아가 타인과 조직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단군, 고주몽, 김춘추, 왕건, 이순신 등은 우리 역사의 천재들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세종대왕 이도(李)는 1397년 태어나 1418년 6월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선택으로 두 달 만에 4대 임금이 됐다. 피비린내와 풋내를 벗지 못했던 조선은 세종대왕이 즉위한 1418년부터 과로와 당뇨병으로 운명한 1450년까지 32년 동안 질적으로 변신했다. 고려를 없앤 명분과 조선을 존속시킬 힘을 동시에 얻었다.불가사의하다. 그의 업적을 보면 한 인물이, 한 시대에 이렇게 의미 깊고 다양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다. 그를 역사의 천재로 만들었을 시대 상황, 정책에 참여한 인물, 업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본다. 세종대왕을 정치인의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 젊은 임금은 야망과 집권 의지를 가진 건국세력을 견제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정원을 강화하고, 도승지(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실력이 뛰어난 학자들로 신권력집단을 양성했다.둘째, 성리학을 활용해 ‘성(性)’과 ‘법’, ‘률’로 합리적인 국가 체제의 토대를 완성했다. 귀족, 무신, 권문세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에 둘러 쌓인 한양…무역·개방적 국제도시로 발돋움엔 한계 있어

    한양은 서해와 백두대간을 잇는 한강 수로망을 이용해 쌀 같은 특산물의 세금을 받아들이는 조운체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소작료, 땔감과 공공건축에 사용될 재목, 소금, 생선 등을 보급받았다. 한반도는 지형이 험한 데다 적의 침공 속도를 늦추려고 넓은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으므로 한강 수로망에 크게 의지했다. 한양의 한강가에는 20여 개 나루터가 있었고, 몇 곳에는 창(창고)이 존재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곡식 등의 물품은 광흥창(서강), 상류에서 내려온 물산은 군자강창에 보관했다. 그러나 규모나 시설, 역할 등으로 보아 상업항 기능은 못했고, 개경과 비교하면 해양무역과 연결되는 항구의 역할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한양의 한계와 신수도 건설 시기에 대한 의문한양은 지식관료들의 수도, 방어적인 약소국의 수도로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국가 산업과 상업, 무역을 발전시키는 경제도시, 개방적인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려면 시설을 보완하고 도시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했다. 사대문, 사소문과 연결된 육로를 확장하고 신도로를 개설해서 사통팔달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강에는 자연 나루터가 아닌 부두를 신축하고, 창고 시장 등의 시설을 보완해 항구들을 개발해야 했다. 청계천을 계속 준설해 수로망으로 활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처럼 용산강에서 남대문까지도 수레길이나 운하를 건설해야 했다. 외곽 도시들, 특히 인천(능허대), 김포, 강화 등에 항구도시들을 개발해 한양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 또 강변방어체제를 촘촘하게 쌓고 강상수군도 양성해야 했다.그런데 한양의 기본 구조와 역할은 천도 초기의 불가피한 급박한 상황이 지난 후에도 큰 변화가 없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혁명세력들, 천연 요새인 한양으로 천도 단행…성리학 이상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 필요했죠

    조선 건설 세력은 왜 서둘러 천도를 결정하고, 한양을 수도로 선택했을까. 수도 선택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백성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세계 역사에는 수도를 잘못 선택해 멸망한 나라들이 많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러한 예들이 있다.이성계, 정도전, 승려 무학 등 조선을 건설한 이들의 천도 결정은 조선의 백성과 역사,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신세력은 개경 지역에 토대를 둔 구세력과 권력, 토지 및 자원 확보, 상업권, 그리고 명분과 정통성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개경은 왜구에 여러 차례 위협당했고, 홍건적에 점령당한 적이 있어 방어상에 취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은 이상을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천도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도시의 체계와 성립 조건수도의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왜 한양을 선택했을까. 수도의 위치와 체계는 정치·군사·경제·문화·사상 등의 요구에 부응해 선택되고 형성된다.첫째, 교통과 통신망이 발달한 정치와 외교 중심지로 중앙 집중화와 관리체제의 일원화에 효율적이어야 한다.둘째, 전 근대에는 모든 권력과 기능이 수도로 집중되는 만큼 안전한 방어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다.셋째, 물자의 집결이 편리해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고 경제중심지 역할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아테네 등 폴리스나 중국의 난징·카이펑·항저우·베이징, 일본의 오사카·에도 등은 수도이면서 상업도시, 항구도시였다.넷째, 중요한 문화의 생산지와 집결지이며, 소비지(수요)이면서 공급지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신앙의 중심이고, 사상적인 의미도 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신진사대부는 성균관과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치른 학자적 관리들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비판의식이 강한 이상주의자로, 야망을 실현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도전과 같이 신분이 한미하거나,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중소 토지만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기득권에 막혀 중간 관료에 머물렀다. 따라서 권문세족과 기존 질서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력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해 세력을 이룬 이들은 ‘내우외환’이라는 고려 사회의 위기를 통감했다. 따라서 개혁이라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과 학문적인 기반, 가계의 차이 등으로 점차 입장에 차이가 생겨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서 최영이 죽고 우왕이 쫓겨나자 온건파의 위기감은 최대치로 증폭됐다. 결국 두 세력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온건파의 대표였던 정몽주는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이색·길재 등을 비롯해 ‘두문동 72인’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다가 숙청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이 추진한 혁명의 내용과 성격3단계는 건국에 성공한 이들이 사회를 개혁시키는 혁명 과정과 권력투쟁이다. 급진 개혁파는 다시 두 부류로 분열됐다. 하나는 힘을 장악한 이성계 이방원 등의 무장과 조준 같은 학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의 실질적 주역이자 혁명 이론과 정책의 근본 틀을 다진 정도전 중심의 강성 개혁자들이었다.정도전은 학식이 뛰어나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장량을 자처할 정도로 출중

  • 커버스토리

    "경제 살리자"…돈 푸는 지구촌, 한국 1년새 413조…미국 14년간 1경 늘었죠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돈이 얼마나 풀렸는지 알아보고 싶군요. 통화량 변화를 보면 여러 가지 경제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알 수 있어요. ‘M2’라는 기준으로 통화량을 봅시다. M2는 현금과 요구불 예금, 수시입출금식 예금(여기까지가 M1), 2년 미만 정기예적금, 양도성예금증서 등을 포함해서 통화량을 재는 방식입니다. 단기간에 현금화해서 쓸 수 있는 돈의 총량이죠.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7년 M2는 2471조원이었습니다. 2018년엔 2626조원으로 늘었습니다. 2019년 2913조6000억원, 2020년엔 3199조8000억원이 됐습니다. 처음으로 3000조원을 돌파했습니다. 2021년 M2는 3613조7000억원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무려 413조9000억원(12.9%) 늘어난 겁니다. 1년 만에 400조원 이상 늘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언론들은 “통화량이 사상 최대 규모로 증가했다”고 크게 보도했습니다.특히 작년 통화량 증가율은 세계 1위 수준입니다.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은 물론이고 브라질, 멕시코 같은 나라보다 돈을 더 풀었다는 뜻이죠. 유로존 증가율은 7.0%였습니다. 브라질 10.9%, 스웨덴 9.5%, 멕시코 7.6%, 뉴질랜드 7.1%, 러시아 6.7%였지요. 미국이 우리나라와 같은 12.9% 늘었답니다.미국 통화량은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자세히 봐야 합니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직후부터 경제를 살리기 위해 통화량을 대폭 늘렸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양적완화(QE:Quantitative Easing)’라고 부릅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2008~2011년 상반기에 1차로 1조7000억달러를 공급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0조원(2022년 한국 1년 예산 607조원)에 달합니다. 미국은 2011년 하반기에 2차로 6000억달러를 더 뿌렸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려 지키자 vs 새 나라 세우자, 둘로 갈린 개혁파…이성계·정도전 등 급진파, 온건파 숙청 후 조선 세워

    조선의 건국에는 ‘역성혁명’이란 수식어구가 따라붙는다. 왕조의 개창은 혁명에 해당할 수 있는 대사건이다.우리 역사에는 혁명에 해당하는 사건이 많지 않았으므로 정의와 개념, 평가에 대해 공감할 만한 기준이 없다. 혁명은 꼭 필요한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추진해야 하는 걸까. 성패의 기준은 무엇이며, 책임은 어느 단계까지 져야 하는 걸까.고구려 건국은 정권 교체나 새 나라의 건국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중국적인 질서와 구시대를 타파한 후 신체재와 원조선 문화의 회복을 실행한 혁명이다. 주몽이 선언한 ‘다물(옛 땅을 수복한다는 고구려말)’의 의미는 그것이다. 왕건의 고려 건국 또한 정변을 넘어 사회체제의 전면적인 변혁을 가져온 혁명이다. 그렇다면 ‘역성혁명’이 따라붙는 조선의 건국은 어떤 혁명이며, 성패와 공과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3단계로 보는 조선의 건국 과정조선의 건국 과정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1단계는 위화도 회군과 개혁파들의 등장이다. 고려 말은 원나라의 압박과 친원파의 발호, 그들과 결탁한 권문세족들의 부패로 인해 이미 붕괴가 많이 진행된 상황이었다. 체제 불안이 심각했고, 민란도 발생했다.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했고, 명분도 충분했다. 이에 공민왕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문제는 외부상황이었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북원의 침략과 명나라의 간섭은 고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홍건적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 개경이 함락당하는 지경이었다.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들의 침입은 전 해안 지역에서 창궐했다. 국가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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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정벌 4불가론' 앞세워 위화도서 돌아온 이성계, 신진사대부와 결탁해 역성혁명…최영 등 정적 제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한 예기치 않은 사건이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가 안정되자 고려의 요동 진출 가능성을 우려했다. 실제로 공민왕은 1369년과 1370년 요동 지역의 동녕부를 공격했고, 이때 고구려의 수도권인 환인의 오녀산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남은 북원의 세력을 완전하게 토벌하자 명나라는 요동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고, 고려에 1388년 원나라에서 되찾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요구했다. 위화도 회군과 개혁의 시작고려와 명나라의 위상을 결정짓는 사건을 놓고 정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요동 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는 논리를 펴는 실권자인 최영의 주장대로 요동 정벌이 결정됐다. 이미 두 차례 요동작전을 펼쳤고 당시의 불확실한 국제정세, 추후 명나라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최영의 판단은 무모하지 않았다.반대파였던 이성계는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발해 음력 5월 7일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다. 하지만 물의 범람을 핑계로 14일 동안 도하를 미루다가 ‘4불가론’을 내세웠다. 그 가운데 첫째가 이후 조선의 정책과 사대부들의 인식에 굴레를 씌웠고, 바로 지금껏 우리 뇌리에 박힌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는 문구다. 그는 회군한 지 11일 만에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고 쿠데타에 성공했다.이성계는 특별한 기반이 없는 변방세력이었지만 출중한 전투능력과 사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신흥군벌로 중앙정계에 진입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참전해 공을 세웠다. 1361년 10만 명의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할 당시 개경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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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간 600회 가량 왜구의 침략 이어져…고려,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 결국 멸망

    통일국가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왜구의 침략은 큰 역할을 했다. 몽골과 원나라에 시달린 고려는 말기 40여 년간 왜구에게 무려 591회에 달하는 침략을 받았고 결국 멸망했다. 왜구의 침략은 이후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다 ‘임진왜란’이란 정규군의 공격으로 대체됐다.왜구는 중국 해안과 연해주 일대까지 약탈했지만, 주로 고려에 집중됐다. 왜구의 끝없는 침략과 고려의 대응왜구들은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100여 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때는 14년 동안에 378회나 쳐들어왔다. 1350년~1392년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왜노들의 침략으로 나라는 이미 섬의 물고기·소금·목축의 이익을 잃었고, 또 곡식이 나는 기름진 들판을 잃었다”고 토로했다. 또 연해의 수천리 지역에는 인가에서 연기가 끊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는 1377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려는 논의까지 했다.고려는 뒤늦게 수세적인 태도를 버렸다. 처음에는 공격 대신 회유책을 사용했다. 공민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대마도 만호에게 쌀 1000석을 주고 귀화를 원하는 왜구에게 남해안의 일부 지역을 거주지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왜구는 1374년 4월에 전선 350척을 동원해 합포(마산)로 진입했다. 왜구의 해적선은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명에서 200여 명, 소선은 40~80명 정도가 승선이 가능했다. 이에 비춰 400~500척씩 선단을 구성했으니 마치 전면전 같은 양상이었다. 이때 벌어진 해전에서 고려는 40척이 손실되고, 5000명이 전사하며 패배로 끝났다.고려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이유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현상 때문이었다. 왜구들의 거점은 주로 대마도 이끼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