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역사적 천재'세종대왕(上)
서울 광화문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서울 광화문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역사에서 천재가 등장할 때 사회는 급변하고, 동시대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족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의 천재’란 어떤 성격과 능력을 갖췄을까. 이들은 머리가 좋고,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과 현상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다. 더불어 모든 사람을 아끼고, 시대와 자연까지 돌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한다. 나아가 타인과 조직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단군, 고주몽, 김춘추, 왕건, 이순신 등은 우리 역사의 천재들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세종대왕 이도(李)는 1397년 태어나 1418년 6월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선택으로 두 달 만에 4대 임금이 됐다. 피비린내와 풋내를 벗지 못했던 조선은 세종대왕이 즉위한 1418년부터 과로와 당뇨병으로 운명한 1450년까지 32년 동안 질적으로 변신했다. 고려를 없앤 명분과 조선을 존속시킬 힘을 동시에 얻었다.

불가사의하다. 그의 업적을 보면 한 인물이, 한 시대에 이렇게 의미 깊고 다양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다. 그를 역사의 천재로 만들었을 시대 상황, 정책에 참여한 인물, 업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본다. 세종대왕을 정치인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경기 여주시에 자리한  세종대왕릉.  한경 DB
경기 여주시에 자리한 세종대왕릉. 한경 DB
첫째, 젊은 임금은 야망과 집권 의지를 가진 건국세력을 견제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정원을 강화하고, 도승지(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실력이 뛰어난 학자들로 신권력집단을 양성했다.

둘째, 성리학을 활용해 ‘성(性)’과 ‘법’, ‘률’로 합리적인 국가 체제의 토대를 완성했다. 귀족, 무신, 권문세족 등 가문에 근거한 고려 후기에 대한 반동이었고,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한 건국세력을 견제하는 정책이었다.

셋째, 건국의 정당성을 세우고, 정치의 명분을 분명히 할 목적으로 이론을 정립하고, 역사서를 편찬했다. 말년인 1445년에는 질병의 고통을 무릅쓴 채 조선의 창업과 가계를 찬양할 목적으로 《용비어천가》 제작에 몰두했다. 《삼국사기》를 애독한 그는 우리 역사의 가치와 조상들의 소중함을 알고, 1443년엔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다. 죽음 직전까지 《고려사》를 편찬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또 1429년 7월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과 관련된 기록을 인용하고, 북부여 동부여 등의 역사를 서술한 것은 세종 시대의 인식과 결과물이다. 또 1444년에는 전통역(曆)과 원나라·명나라의 역, 정확한 이슬람역을 참고해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완성했다. 이는 천체의 운행을 정치 행위에 비유해 나라의 자의식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당시 명나라가 알면 심각한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즉위 2년인 1420년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1434년에는 갑인자를 제작해 이런 출판 사업들이 발전할 수 있었다.

넷째,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국제질서를 최대한 활용했고,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무렵 명나라의 3대 영락제는 주변 국가를 군사적으로 정복했다. 1405년부터 환관인 정화를 지휘자로 7차에 걸쳐 해양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 때문에 명나라 중심의 질서에서 탈피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주성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 정치적 보장과 무역상 실리를 선택했다.

세종은 무장인 태조와 태종의 유전 때문인지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군사력 증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432년(즉위 14년) 12월 여진족이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약탈하자 분노한 세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작전회의에 참여하면서 직접 전술까지 지시했다. 결국 두만강 유역에 6진,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해 발해 멸망 후 불안정했던 이 지역을 안정적인 영토로 삼았다.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땅을 개간하는 사민(徙民)정책까지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나 일부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비록 상왕인 태종의 정책이었지만, 즉위 해인 1419년엔 이종무를 파병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어 1426년 삼포(부산, 창원, 울산)를 개항했고, 1443년에는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432년(즉위 14년) 12월 여진족이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약탈하자 분노한 세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두만강 유역에 6진,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해 발해 멸망 후 불안정했던 이 지역을 안정적인 영토로 삼았다. 또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즉위 해인 1419년에는 이종무를 파병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어 1426년 삼포(부산, 창원, 울산)를 개항했고, 1443년에는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