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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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권력 유지 위해 한자 고수하는 기득권자에 대응…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 만들어
세종은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과 《월인천강지곡》 500여 곡을 비롯해 《석보상절》 같은 불교 서적에 훈민정음을 활용했다. 이후 신권(臣權)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왕들은 《훈몽자회》 《삼강행실도》 《소학》 《천자문》과 각종 의서 편찬에 훈민정음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기적의 문자’ 훈민정음은 공문서 등 국가의 공적 역할은 하지 못하고, ‘언문’ ‘암글’ ‘중글’ 등의 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왜 450여 년 만인 1894~1896년 갑오개혁 때야 비로소 나라글로 인정받았을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 조선 시대에 ‘문자’는 필수적인 기호가 아니었다. 우리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생태환경과 유별난 역사, 생물학적 특성 탓에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매우 감성적이었고,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에 서툴렀으며, 사회구조의 필요성도 약했다. 또한 조선은 농업 중심의 씨족공동체 사회였다. 따라서 상업·산업이 발달한 사회보다 거래와 소통이 덜 필요했고, 효율적이고 계량적인 문자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둘째, 한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성리학자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고, 경제적으로 유일한 재화이자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도덕과 학문·예술을 만들고 보급하며 감독하는 고위 관리 또는 출세를 고대하는 예비군이었다. 더구나 사대교린 정책을 선택했고, 자의식도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들은 끝까지 한자와 한문을 고집했다. 어려운 한자 … 해석에도 유추 심해한자는 ‘동이인&r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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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통하지 않으니…애민군주 세종, 독창성·탁월함 갖춘 한글 만들다
한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글자다. 동시에 인류의 지적 성장, 향상된 사고능력, 과학의 발전, 진보된 사상(인간주의)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특히 개인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기간에 창작한 글자란 점에서 주목받는다. ‘표음문자’여서 학습하기 쉽고 사용이 편리하다. 논리적인 음운체계 덕분에 사용자가 수리적 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구조와 제정 방식에 관심이 많다.필자는 역사학자로서 한글을 창조한 목적이 궁금하다. 세종은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을 소유한 최고의 권력자였다. 국가경영자인 동시에 뛰어난 학자였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에 그의 사상과 구현 방식(논리)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홍익인간 사상과 ‘3의 논리’이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표현됐다.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에는 목적을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했다. 당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사정을 ‘어엿비’ 여긴 ‘어린 백성(愚民)’은 그리스나 로마의 특수한 시민이나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등장한 신사(부르주아지)가 아니었다.세종의 정책 근간은 백성의 생활 편의와 풍족함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농사에 도움을 준 점, 조세를 감면해 ‘공평화’를 도모한 점에서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의창, 혜민서, 활인서 등을 설치해 백성의 굶주림과 질병을 치료했다. 당시 이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는 법까지 제정했다. 이런 세종은 모든 백성이 자기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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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유복한 생활'임을 안 세종…농업 기술개발에 힘쓰고 세금 공평하게 내게 했죠
세종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장비를 만들고, 무기를 개량했다. 1448년 신기전이 발명됐는데, 한 번에 15발씩 연속으로 100발을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가 1000m 이상인 신병기였다. 수레 등으로 운반이 가능한 조립식 대포(총통 완구)를 만들고 화포 주조와 화약 사용 방법, 규격 등을 그린 《총통등록》도 발간했다. 해전을 위해 일본인과 유구인의 도움을 받아 개선한 선박을 한강에서 시험운행했다.‘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고 했던 태종의 평가처럼 뛰어난 전제군주라고 볼 수 있지만, 세종은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대지주인 신하들 반대 무릅쓰고 조세공평화세종은 백성들의 생활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착취경제가 아닌, 생산경제의 도입을 시도했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유복한 생활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인본주의자였다. 농법 개량에 노력을 기울여 1429년에는 농사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농사직설》을 편찬했다.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록 통치기술로도 활용했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강했다. 1433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이듬해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1442년부터는 측우기를 사용, 전국의 강수량을 골고루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줬다.그는 조세를 감면하는 정책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국의 토지를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비옥도를 검사해 6등급(전분육등법)으로 나눴고 20년마다 재측량했다. 이렇게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대지주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7년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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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역사에서 천재가 등장할 때 사회는 급변하고, 동시대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족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의 천재’란 어떤 성격과 능력을 갖췄을까. 이들은 머리가 좋고,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과 현상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다. 더불어 모든 사람을 아끼고, 시대와 자연까지 돌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한다. 나아가 타인과 조직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단군, 고주몽, 김춘추, 왕건, 이순신 등은 우리 역사의 천재들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세종대왕 이도(李)는 1397년 태어나 1418년 6월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선택으로 두 달 만에 4대 임금이 됐다. 피비린내와 풋내를 벗지 못했던 조선은 세종대왕이 즉위한 1418년부터 과로와 당뇨병으로 운명한 1450년까지 32년 동안 질적으로 변신했다. 고려를 없앤 명분과 조선을 존속시킬 힘을 동시에 얻었다.불가사의하다. 그의 업적을 보면 한 인물이, 한 시대에 이렇게 의미 깊고 다양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다. 그를 역사의 천재로 만들었을 시대 상황, 정책에 참여한 인물, 업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본다. 세종대왕을 정치인의 관점에서 살펴보자.첫째, 젊은 임금은 야망과 집권 의지를 가진 건국세력을 견제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정원을 강화하고, 도승지(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실력이 뛰어난 학자들로 신권력집단을 양성했다.둘째, 성리학을 활용해 ‘성(性)’과 ‘법’, ‘률’로 합리적인 국가 체제의 토대를 완성했다. 귀족, 무신, 권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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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오등은 자에~' 대 '우리는 오늘~'
“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此로써世界萬邦에告하야….”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 독립선언서가 울려퍼졌다. 일제 강점하에서 분연히 떨쳐일어나 민족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이다. 우리말글 관점에서는 아쉬움도 많은 글이다. 선언서의 첫머리만 봐도 숨이 막힌다. 어미와 토씨를 빼곤 죄다 한자로 돼 있다. 100여 년 전 우리말글 실태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어미와 토씨 빼곤 한자로 된 3·1독립선언서한자 의식이 점차 약해져 가는 요즘은 아예 이를 읽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을 것 같다. 한글로 옮기고 띄어쓰기를 해보면 좀 나을까?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여전히 어렵다. 독립선언서를 따로 배우지 않은 세대라면 아마 첫 구절부터 막힐 것이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이라니? 한자어를 단순히 한글로 옮겨쓴 문장이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이태 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정부에서 ‘쉽고 바르게 읽는 3·1 독립선언서’ 작업을 벌였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이제 의미가 또렷해지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민족의 독립을 선언한 지 1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국민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문장으로 바뀌어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쉬운 우리말 쓰기’ 개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원조는 마땅히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훈민정음 서문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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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책요? 책이요?…변신 꾀하는 보조사 '-요'
지난 9일은 574돌 한글날이었다. 이날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해 반포한 1446년을 기점으로 삼아 제정됐다. 한글이 탄생한 지 500년이 훨씬 넘었으나 우리 정서법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은 것은 100년이 채 안 된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3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마춤법 통일안’을 내놓은 게 밑거름이 됐다. 종결형으로 쓰인 ‘책이요’는 규범에서 벗어나그 사이 우리 맞춤법은 많이 변했다. 그중 하나로 요즘도 늘 헷갈리는 게 어미 ‘-이요’와 ‘-이오’, 그리고 보조사 ‘-요’ 용법의 구별이다.1933년 한글마춤법 통일안에서는 이를 어떻게 제시했을까? <‘이요’는 접속형이나 종지형이나 전부 ‘이요’로 한다.>고 했다. 가령 “이것은 붓이요, 저것은 먹이요, 또 저것은 소요.”처럼 썼다. 현행 한글맞춤법에서는 다르다. 제15항 어간과 어미를 적는 방식에 관한 얘기다. <종결형에서 사용되는 어미 ‘-오’는 ‘요’로 소리 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원형을 밝혀 ‘오’로 적는다.>고 했다. “이것은 책이오./이리로 오시오.”(책이요×/오시요×)가 현행 규범이다. 또 <연결형에서 사용되는 ‘이요’는 ‘이요’로 적는다.>고 했다. 이에 따라 “이것은 책이요, 저것은 붓이요, 또 저것은 먹이오.”처럼 구별해 써야 한다. 정리하면 ‘-이요’는 연결어미로만, ‘-이오’는 종결어미로만 쓸 수 있게 했다. 이들은 모두 [이요]로 소리 나지만 각각의 쓰임새에 따라 구별해 적도록 한 것이다. 현실언어에서는 쓰임새 활발…규범화 진행 중2019년 5월 국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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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자갸'는 표준어, '자기'의 높임말이죠
10월은 유난히 한글과 우리말 발전에 기념비적인 날이 많은 달이다. 우선 지난 9일이 제573돌 한글날이었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3년 뒤인 1446년 이를 반포했다.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지금의 한글날이다. 훈민정음 반포일이 음력으로 ‘9월 상한’이라는 기록(훈민정음해례본)을 토대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 정해졌다.‘조선어 표준말 모음’으로 우리말 바로 세워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게 1933년 10월이다. 이는 일제의 식민 지배하에서 우리 고유의 글자인 한글을 지키고 널리 보급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던 노력의 결실이었다. 통일안이 나옴으로써 비로소 ‘우리말을 한글로 어떻게 적을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일관된 기준이 갖춰졌다. ‘한글 맞춤법’의 기초 얼개도 이때 짜였다.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총칙 제1항은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맞춤법 기본정신이다.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쓴다’는 원칙도 마련됐다.3년 뒤 1936년 10월 28일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나왔다. 83년 전 오늘이다. 당시에는 우리말을 지키고 바루기 위해 표준어 사정작업이 절실했다. 예를 들면 하나의 대상을 두고 ‘하늘, 하눌, 하날’ 식으로 제가끔 쓰였다. 이를 ‘하늘’로 통일한 것이다. 그렇게 사정한 어휘 수가 9547개였다. 그중 6231개가 표준어로 채택됐고 3082개는 비표준어로 분류됐다. 나머지는 약어 134개, 한자어 100개였다.표준어 사정작업은 내용적으로 우리말사(史)에서 두 가지 의의를 지녔다. 하나는 같은 대상을 두고 여러 다른 표기가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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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탄신일'보다 '나신날, 오신날' 어때요?
'탄신일'보다는 '나신날' '오신날'이 더 맛깔스럽다. 어감상으로나 조어법상으로나 그렇다. 쉽고 친근한 표현이 우리말을 살찌운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다.부처님오신날(22일)을 앞두고 거리에는 벌써 연등이 걸렸다. 이날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는 그동안 석가탄신일이었다. 이를 줄여 석탄일 또는 불탄일이라고도 했다. 달리 초파일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석가탄신일을 명절의 하나로 부르는 이름이다. ‘초팔일(初八日)’에서 음이 변한 말이다. 정부에서 2017년 입법예고를 거쳐 10월10일 국무회의에서 확정함으로써 비로소 부처님오신날이 공식 명칭이 됐다. 고유명사화한 말이므로 띄어 쓰지 않고 붙여 쓴다는 점도 기억해 둬야 한다.탄신일은 ‘생일+일’ 같은 겹말 표현불교계에서 이날을 ‘부처님오신날’로 바꿔 쓴 지는 꽤 오래됐다. “1960년대 조계종이 지나치게 민속화된 불탄일에 대한 불교적 의미를 복원하고, 한자어로 돼 있는 불탄일·석탄일을 쉽게 풀이해 사용하자는 취지로 만들었다”는 게 불교계의 설명이다(‘한국세시풍속사전’). 여기서 ‘한자어 명칭을 쉽게 풀어 쓰자’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1968년 봉축위원회에서 부처님오신날을 쓰기로 결의했다(법보신문 2017년 10월10일자)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딱 반세기 전 일이다. 쉽고 친근한 말, 대중에게 다가가는 말에 눈뜬 당시 불교계의 ‘우리말 순화운동’(?)이 자못 선구적이었다고 할 만하다.‘탄신일’은 조어법상으로도 바람직한 말이 아니다. ‘탄신(誕辰)’으로 충분하다. 어른한테는 생일이라 하지 않고 생신(生辰)이라고 한다는 걸 어려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