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사상(下)
훈민정음 제정 무렵에 일본에 파견됐던 집현전 학자인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
훈민정음 제정 무렵에 일본에 파견됐던 집현전 학자인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
세종은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과 《월인천강지곡》 500여 곡을 비롯해 《석보상절》 같은 불교 서적에 훈민정음을 활용했다. 이후 신권(臣權)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왕들은 《훈몽자회》 《삼강행실도》 《소학》 《천자문》과 각종 의서 편찬에 훈민정음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기적의 문자’ 훈민정음은 공문서 등 국가의 공적 역할은 하지 못하고, ‘언문’ ‘암글’ ‘중글’ 등의 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왜 450여 년 만인 1894~1896년 갑오개혁 때야 비로소 나라글로 인정받았을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 시대에 ‘문자’는 필수적인 기호가 아니었다. 우리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생태환경과 유별난 역사, 생물학적 특성 탓에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매우 감성적이었고,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에 서툴렀으며, 사회구조의 필요성도 약했다. 또한 조선은 농업 중심의 씨족공동체 사회였다. 따라서 상업·산업이 발달한 사회보다 거래와 소통이 덜 필요했고, 효율적이고 계량적인 문자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한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성리학자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고, 경제적으로 유일한 재화이자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도덕과 학문·예술을 만들고 보급하며 감독하는 고위 관리 또는 출세를 고대하는 예비군이었다. 더구나 사대교린 정책을 선택했고, 자의식도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들은 끝까지 한자와 한문을 고집했다. 어려운 한자 … 해석에도 유추 심해한자는 ‘동이인’들이 처음 만들어 한족이 주도했지만, 중국을 다스린 다수 종족의 역사와 문화가 합쳐지면서 완성됐다. 따라서 역사의 노정과 다양성,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비합리적인 구성 때문에 해석에 유추가 심하다. 또 비논리적이므로 내용과 논지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사용 과정에서 갈등과 오해의 발생이 불가피해 방어 전략으로 유연성, 추상성, 풍부함, 깊이 등을 강조했다. 이는 중국 문학, 사상, 예술의 장점으로 포장됐다. 무엇보다 구성이 어렵고 복잡한 글자가 많아 긴 시간과 큰돈이 투자되지 않으면 습득과 활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소수 지배계급 위주의 사회와 교조적 문화의 양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때때로 의구심을 갖는다. 조선조 학자들의 한문 실력으로 우주의 본질과 세계의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고, ‘이기론(理氣論)’ ‘성정론(性情論)’ 등 형이상학적 논쟁을 깊이 있게 벌일 수 있었을까.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서툴렀을 것이고, 이에 학문·문화·예술도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농업·어업·상업·산업 등의 기술과 지식을 표현하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배격한 이유성리학자들은 비효율적이고 학습이 어려운 한자를 고수하면서 왜 훈민정음은 용도폐기했을까. 태생적으로 특권 세력인 그들은 항구적인 권력의 독점과 유지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우민화하고, 자신들과의 차이점을 강조해 우월성을 강요할 도구로 ‘한자’라는 기호를 독점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유추에 근거한 자기주장이 강한 교조적 사회, 실생활을 무시하고 관념적인 지식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가 됐다. 또한 성리학과 실체가 불분명한 중국에 사대하는 독특한 나라가 됐다. 현명하고 통찰력이 강한 임금 세종은 이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런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방어할 목적의 하나로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창제했을지도 모른다. 한글은 나라의 멸망과 식민지라는 아픔을 겪고, 500년 만에 화려한 부활을 했다. 민주주의, 산업화, 정보화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맞아 표기방식의 효율성, 신속한 판단과 응용능력 향상에 적합한 기호로, 디지털 문명의 선도국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역사의 천재’인 세종대왕은 권력의 탈취, 생산양식의 변화,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이 아니라 합리적인 정책과 지식의 전수, 기호 사용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이상세계를 건설하려 한 혁명가였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권력 유지 위해 한자 고수하는 기득권자에 대응…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