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한양 천도의 공과와 역사적 평가 (下)
그런데 한양의 기본 구조와 역할은 천도 초기의 불가피한 급박한 상황이 지난 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세종대왕은 도성을 개축했고, 수군력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귀화한 왜인과 유구(오키나와)인을 동원해 전선을 개량해 양화도(양화대교 아래)에서 시험 운항도 했다. 하지만 한양의 기본적인 한계를 해결하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런데 신수도를 건설한 과정과 시기가 과연 적합했느냐는 의문이 든다. 1394년 8월에 한양이 수도로 결정된 후 1395년에는 종묘와 경복궁을 완공했고, 사대문과 궁궐 성곽도 이른 시간 안에 건설됐다. 북한산성은 둘레 약 18㎞에 높이 15척(4.5m)의 석성과 토성인데, 1396년에 축성됐다.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에 완성됐다. 훗날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느라 국가 재정을 파탄 내고, 백성의 원성으로 자신이 몰락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신수도 건설은 엄청난 경제력을 투자하고,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한 대역사였음이 분명하다. 수도는 실용성·국제 질서·국가 미래 고려해야조선 건국 당시는 정변한 직후라 민심이 불안했고, 생활도 불안정했다. 왜구는 수도를 한창 건설 중인 1393~1397년 사이에만 무려 53회 침공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천도를 강행했다면 고려가 남긴 경제력과 방어력이 충분했거나, 아니면 엄청난 국고의 손실과 안보 위협을 무릅쓴 채 강행한 꼴이 된다.
수도의 선택은 정권의 운명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므로 실용성, 국제 질서, 국가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공동 책임을 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합의와 책임 의지의 점검이 우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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