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개항에서 임오군란까지 (下)
명성왕후가 피난처로 삼기 위해 지은 양주 매곡리 집.
명성왕후가 피난처로 삼기 위해 지은 양주 매곡리 집.
집권 세력은 위기의식을 가졌지만 멸망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예상하지 않은 것 같다. 13년 정도 일찍 외세에 개방당한 일본은 개혁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고, 국제관계도 그레이트 게임의 주변부로 움직이면서 변화무쌍했다. 그 때문에 조선에 반전의 시간과 기회는 있었고, 실제로 36년 뒤에야 일본에 합병당했다.

명성황후 정권의 외교정책과 외교관 등 외국인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개혁과 구국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판단된다. 1876년에 1차 수신사를 파견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충격받아 <일동기유(日東記游)>를 써 정부에 보고했다. 1880년 6월에는 2차 수신사로 김홍집 일행을 파견했고, 12월에는 정부 조직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외교·내정·군정 등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이어 1881년 4월에는 ‘조사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신사유람단’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이때 62명은 74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분야를 치밀하게 조사한 뒤 100여 책의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중간인 5월에는 장교를 양성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9월에는 ‘영선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유학생을 파견해 청나라의 양해하에 군수 공장 등에서 화약과 탄약 제조법을 비롯한 군사 분야의 기술과 외국어를 배우게 했다.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강화도 연무당터.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강화도 연무당터.
한편 자주외교를 표방하면서 청나라에는 책봉 체제를 없애고 근대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으며, 일본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 조항을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 국교 수립을 추진하고, 김홍집이 가져와 개혁과 외교정책의 모델로 삼은 <조선책략>을 보급했다. 이 책은 청나라의 외교관인 황준헌이 일본에서 만난 김홍집과 조선의 현실과 미래를 논하면서 조선의 개혁과 외교정책을 조언한 책이다. 40년 먼저 국가적인 패배를 경험한 청나라 관리인 그는 러시아의 남진을 극도로 우려하는 조선, 청, 일본, 미국을 활용하라는 ‘친(親)청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이라는 정책 구도를 제안했다. 즉 삼국이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갖고, 미국의 역할을 활용하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서양 풍속들과 천주교의 범람을 막는 일에 의미를 둔 유림과 보수세력은 ‘위정척사’라는 프레임으로 사회운동과 사상투쟁을 벌였다. 영남의 유생은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궁궐 앞에서 집단 상소했다. 이른바 ‘만인소’다. 그리고 강경하게 탄압하는 정부에 대항해 백성과 더불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관료들의 처단까지 요구했다. 결국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상대적으로 덜 불평등한 이 조약으로 관세제도가 도입되는 등 근대화에 필요한 조치들이 취해졌고, 근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는 계기도 마련됐다.

그런데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개혁 정부는 별기군을 운영하는 재정이 부족해지자 구식 군대의 예산을 빼서 투입했다. 그러자 1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한 데다 처우에 불만을 가졌던 일부 군인은 폭력을 행사하는 등 공권력에 도전했다. 초기에는 목적의식이 희박하고, 사적 이익과 연관된 군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소요였다. 하지만 대원군 등의 책략과 보수세력의 지원으로 군사 쿠데타로 변질돼 일본 공사관을 방화하고, 교관을 비롯한 일본 경찰을 살해했다.

대원군은 백성에게 반일 감정을 불어넣으면서 명성황후와 개혁세력의 살해를 기도하고, 개혁을 좌초시켰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탈출에 성공했고, 청나라에 개입을 요청하자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이끌고 와 대원군을 체포한 뒤 청나라로 압송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인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당했으며, 조약 전문에는 조선이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청은 외교적 사항은 자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으며, 주둔한 3000명의 군대로 조정을 협박했다. 피해국인 일본도 이를 이용해 제물포 조약을 맺었다.

임오군란의 배경과 평가를 놓고 명성황후 세력의 부패라는 책임 전가론이 있으나, 세도정치나 대원군 시대에도 부패상황은 심각했으며 군도 부패하고 무책임한 집단이었다. 결국 임오군란은 청나라와 일본의 역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조선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개혁을 좌절시켰다. 또한 청·일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으며, 개혁세력을 사대당과 독립당으로 분열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개혁 정부는 별기군을 운영하는 재정이 부족해지자 구식 군대의 예산을 빼서 투입했다. 그러자 1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한 데다 처우에 불만을 가졌던 일부 군인은 폭력을 행사하는 등 공권력에 도전했다. 초기에는 목적의식이 희박하고, 사적 이익과 연관된 군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소요였다. 하지만 대원군 등의 책략과 보수세력의 지원으로 군사 쿠데타로 변질돼 일본 공사관을 방화하고, 교관을 비롯한 일본 경찰을 살해했다.